鄭伊衡
鄭伊衡1897. 9. 16 ~ 1956. 12. 10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다물단
- · 대한통의부
- · 정의부
- · 고려혁명당
포상 정보
- · 독립장(1963)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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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장(1963) 1897년 (음)9월 16일 평안북도 의주군(義州郡) 월화면(月華面) 화하리(化下里)에서 정효기(鄭孝基)의 2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월화면에서 많은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던 대지주였으며, 12대문의 큰 집도 소유하고 있었다. 참깨를 1,000석씩이나 하였으며, 집 주변에 소작인집이 20여 채나 되었다. 본관은 하동(河東), 호적명은 정원흠(鄭元欽), 이명은 정용현(鄭用賢)이다. 호는 쌍공(雙空)이라고 하였는데, 그 이유는 인생은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친구들 사이에 부르는 이름은 저울이라고 하였다. 일찍이 스승인 김평묵(金平默)과 형 정원익(鄭元釴)의 도움으로 민족의식을 갖게 되었다. 평북 의주 출신으로 외가집 어른인 김평묵은 1917년 만주로 망명하여 대동향약(大東鄕約)을 운영하다가 1919년 만세운동 이후 대한독립단, 의군부 등 대한제국의 재건을 주장하는 복벽주의단체에서 총무부장과 정무총감 등으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김평묵으로부터 교육을 받으면서 점차 항일의식이 성장하였다. 형 정원익은 일찍부터 항일의식을 갖고 구한말 서북학회 회원으로 활동하였고, 1910년 이후에는 독립군에게 군자금을 제공하는 한편 광목으로 독립군의 군복을 만들어 제공하기도 하였다. 또한 형의 사위인 백의범(白義範) 역시 항일투쟁을 전개하다 일본군에게 살해되었다. 1918년경 조국의 독립을 종교의 힘을 통하여 달성해 볼 요량으로 금강산에 들어갔다가 전라북도 장성(長城)에서 온 독립운동가 김계순과 서상연을 만나 서로 의기투합해 1919년 1월 장성으로 이주하였다. 그해 3월 1일 서울 탑골공원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이 소식을 듣고 장성에서 동지들과 함께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1921년 7월 장성군 북하면(北下面) 대악리(大岳里)에 4년제 솔룡(率龍)사립보통학교를 세우고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1922년 10월 정원익이 의주에서 사망한 후 형의 죽음에 보답하는 길은 자신이 항일운동에 투신하여 보다 강렬하게 무장투쟁을 전개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만주로 건너갈 것을 결심하였다. 같은 달 펑톈성(奉天省) 콴뎬현(寬甸縣) 장령(長領)으로 건너가, 그해 12월 초순경 동현 관당(寬堂)에서 대한통의부의 일원인 조병준(趙秉準)의 권유로 동 단체에 가입하였다. 그리고 김창헌(金昌憲)과 함께 사령장 이천민(李天民)·신팔균(申八均)의 부관으로 일하였다. 1923년 겨울 새로운 이념과 방략 하에 독립운동을 전개하고자 하였다. 그러한 때에 마침 평안도 출신들을 중심으로 싱징현(興京縣)에서 다물청년당이라는 비밀결사가 조직되자 여기에 참여하였다. 다물청년당은 1925년 5월 15일에 작성한 당헌에서 민족을 강조하고 아울러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시점에 있어서는 자수·자양·자작·자급해야 하고, 계급상잔의 구태 의연한 생활을 변혁하고 새로운 생활을 시작해야함을 강조하였다. 나아가 전 세계 약소민족과의 연대투쟁을 주장하였다. 지린(吉林) 지역을 중심으로 이성근(李誠根)·김이영(金利榮)·김상범(金尙範) 등과 함께 활동하며 보다 효과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1924년 7월경 본격적으로 대한통의부 의용군의 통의부 반대파 처단에 참여하게 되었다. 의용군 제6중대 제1소대장으로 활동하던 중, 같은 해 가을경 부하 10여 명과 함께 펑톈성 환런현(桓仁縣) 홍묘자(紅廟子) 부근에 살고 있는 의 조모(趙某)를 반통의부 혐의로 육도하자(六道河子)에서 처단하였다. 그해 말에는 제6중대 제2소대장으로서 싱징현 왕청문(旺淸門)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당시 소대의 병력은 무장단원 12명, 소총 5정, 탄약 400발, 권총 6정, 탄약 600발 등이었다. 1924년 11월 24일 정의부(正義府)가 조직되자 이 단체 군사부에 참여하여 중대장으로 활동하였다. 1925년 3월 18일 6중대장으로서 펑톈성 콴뎬현 하루하(下漏河) 약수동(藥水洞) 거주 한인 김모 방에서 정의부 제8중대장 김석하(金錫夏), 6중대 제6소대장 김정호(金正浩)와 회합하였다. 1924년 중 다수의 독립단원이 초산(楚山)경찰서 경찰관에게 피살된 일을 복수하기 위하여 김석하는 초산경찰서 추목(楸木)경찰관 출장소를, 김정호는 외연(外淵)경찰관 출장소를, 그리고 자신은 벽동(碧潼)경찰서 여해(如海)경찰관 출장소를 습격할 것을 계획하였다. 다음날 19일 오전 0시경 3대로 나누어 출발하여, 각 목적지로 향하였는데, 이때 권총 2정을 휴대하고 총기와 탄약을 휴대한 부하 6명을 인솔하는 지휘자가 되어 결빙된 압록강을 건넜다. 오전 5·6시경 여해경찰관 출장소 부근에서 당시 경찰관 5명이 근무하고 있던 출장소를 향하여 총격을 가해, 순사 니시카와 다케요시(西川隆吉)의 머리와 왼쪽 복부에, 순사 임무(林茂)와 신현택(申鉉澤)의 머리에 총상을 입혀 처단하였다. 그리고 순사 시동환철랑(矢動丸鐵郞)의 좌대퇴부에 총상을 입혔음에도 죽지 않자, 출장소의 처마 끝에 석유를 부어 점화시켜 출장소를 전부 소각하였다. 철수 과정에서 38식 보병총 1정과 방한외투 한 벌을 노획하였다. 1925년 7월 경에는 정의부 제6중대 제1소대장으로서 제6중대장 문학빈, 동 중대 소대장 이성근(李成根)·김창호(金昌湖) 등과 함께 군사활동을 전개하였다. 1926년 1월 정의부에서 군민대표회(軍民代表會)를 개최하자 의용군 제1중대 대표 자격으로 참여하여, 같은 달 26일 발표된 정의부 헌장에도 대표로서 서명하였다. 군민대표위원들은 헌장에 정의부를 항일독립운동 전선의 자치정부(준국가)로서, 민주적인 근대 헌법의 체제를 갖춘 엄격한 3권 분립체제, 내각책임제, 지방자치제 등을 시행하는 단체라 명기하였다. 1926년 3월 하순 제1중대장으로서 소대장 김형명(金亨明)을 비롯, 부하 약 20명을 인솔하고 지린성성(吉林省城)에 잠입하여 재류한인으로부터 의무금을 징수하였다. 아울러 한인의 행동을 감시하는 친일 밀정배를 발각 즉시 사형에 처하라는 강경한 입장을 취하였다. 또한 당시 지린 거주 김기풍(金箕豊)·남재수(南在洙)·이덕화(李德花)·안규원(安奎元)·김영호(金永浩) 등이 도박을 하자 이들에게 각각 벌금 100원씩을 징수, 군자금으로 사용하였다. 같은 해 4월 상순 군자금을 모금하기 위하여 창춘(長春)에 거주하는 한인 유두승(柳斗乘)·황도우(黃道宇) 외 수 명에게 청구서를 발송하였다. 정의부 명의로 독립의 자본으로서 500원 내지 1,000원을 일주일 내에 제공할 것이며, 만약 그 기간 내에 돈을 내지 않거나 일제 관헌에게 그 사실을 밀고할 경우는 응징 하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길장선(吉長線) 고유수(孤楡樹)에 있는 부하 수명을 파견하여 모금하고자 하였다. 1925년 6월 중국 동북군벌과 조선총독부 사이에 삼시협정(三矢協定)의 체결로 만주 지역에서의 독립운동이 더욱 어렵게 되자 이를 타개하기 위해, 정의부원으로서 활동 중 스스로 고려혁명당 조직의 발의자가 되어 1926년 3월 29일 지린성 내 양기탁(梁起鐸) 집에서 동당 조직을 위한 집회를 소집하였다. 그해 4월 5일 지린성성 영남반점에서 고려혁명당을 창당하였다. 함께 활동한 고려혁명당의 주요 간부를 보면 만주 지역의 정의부·다물청년당, 국내의 천도교연합회·형평사 등의 인물이 그 중심을 이루고 있다. 4월 8일 오동진(吳東振)·현정경(玄正卿)·양기탁 등과 함께 ‘책임 분담의 건’, ‘정당원 승인의 건’ 등을 결의하였다. 그리고 4월 9일에는 동지 12명과 함께 양기탁을 의장으로 하고, 각지에 청년단을 창설할 것과 당의 방침에 위반되는 기성 청년단의 해방, 당 학교의 설립, 교과서 편찬 등에 대하여 결의하기도 하였다. 4월 12일에는 경비 분담, 세포 조직, 중앙심사위원으로 양기탁·오동진·이동락(李東洛)·주진수(朱鎭洙)·이규풍(李奎豊)을 정하고, 자신은 비서가 은신해 있을 장소를 결정하기로 하였다. 고려혁명당을 조직한 후에는 고려혁명당 당원들이 국제공산당과 중국국민당의 원조를 받아 만주를 근거지로 암살·파괴·방화 등 모든 직접 행동에 의지하여 혁명을 일으키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동학 2대 교주 최시형(崔時亨)의 아들 최동희(崔東曦)를 베이징(北京)주재 소련대사 카라한(Karakhan)에게 파견하였다. 또한 최동희를 당 대표의 자격으로 장제스(蔣介石)를 만나도록 하기 위하여 1926년 7월 1일 중국국민당 최고회의가 열리는 노산(蘆山)으로 파견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시기에 당의 발전을 위하여 유동열(柳東悅)에 이어 청년장교단 대표로 중국국민당에 가고자 하였으나 뜻대로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당원의 확보와 조직을 위하여도 동분서주하였다. 그리하여 만주 지역을 중심으로 우선 약 100명 정도의 당원을 확보하였으며, 만주 지역에 다수의 세포조직을 확보하였다. 1927년 3월 11일 새벽 하얼빈 전가전(傳家甸) 대고(大古) 13도가(道街) 한인 박경종(朴慶鍾)이 경영하는 농업공사에서 동지 6명과 함께 일제의 하얼빈영사관 경찰대에 붙잡혔다. 당시 함께 체포된 인물은 이동구(李東求)·방찬문(方贊汶)·이한봉(李漢鳳)·이원주(李元柱)·유공삼(柳公三)·박기돈(朴基敦) 등이다. 4월 7일 하얼빈총영사관 경찰서로부터 신의주경찰서에 압송되었다가 5월 6일 다시 신의주지방법원 검사국으로 송치되었다. 1927년 12월 19일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열린 제1회 공판에서 재판장이 직업을 묻자 “나의 직업은 00(독립-필자주)운동이다”라고 명쾌히 밝히고, 자세하게 공술할 기회를 주지 않는다고 하여 심리를 거부하는 대담성을 보였다. 또한 공판에서 경어(敬語)를 사용할 것을 요구하였고, 고려혁명당에 대한 신문에 대해서는 완전히 침묵하였다. 1928년 2월 8일에 있었던 2차 공판에서도 “나는 약자이다. 나는 하고자 하는 바를 했을 뿐이다”라고 하고 입을 다물어 버렸다. 1928년 3월 19일 사형을 받았다가 같은 해 4월 20일 무기징역을 받았다. 그 후 평양, 서대문, 공주, 마포형무소 등을 전전하며 옥고를 겪었다. 1945년 광복으로 풀려날 때까지 18년 5개월 17일동안 옥고를 겪으면서도 일제에 끝까지 저항하였다. 1945년 8월 17일 대전형무소에서 풀려났다. 직후 ‘8·15 출옥혁명동지회’를 만들었다. 1946년에는 미군정 산하에서 일종의 국회 역할을 하던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의 관선의원으로 선임되었다. 입법의원 내에 만들어진 ‘부일협력자·민족반역자·간상배(奸商輩) 조사위원회’라는 특별위원회의 위원장에 선임되었다. 또한 만주 지역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운동에 이어 광복 이후에도 김구(金九)·김규식(金奎植) 등과 함께 남북협상에 참가, 남북한의 통일을 위하여 꾸준히 노력하였다. 6.25전쟁 당시 서울에서 어렵게 살다가 1950년 12월 부산으로 피난가 1953년 봄까지 지냈다. 다시 서울 장교동 집으로 돌아와 심장병으로 고생하다가 1956년 12월 10일 사망하였다. 저술로는 『나의 망명 추억기』와 「민족조직화운동에 대하여」 등이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박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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