朱錫煥
朱錫煥1893. 1. 11 ~ 1955. 4. 18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독립장(1968)
관련 사건
- · 성천군 전투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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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장(1968) 1893년 1월 11일 평안남도 강동군(江東郡) 정호면(晶湖面) 숭의리(崇義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만세운동에 참여하였으며, 같은 해 (음)6월 표영준(表永俊)·유성삼(劉成三)·이수영(李秀英) 등과 서간도 안둥현(安東縣)으로 건너갔다. 안둥현에서 잠시 머물다 인접한 콴뎬현(寬甸縣)으로 가서 변호사인 안병찬(安秉瓚)이 주도해 1919년 4월 설립한 대한독립청년단(大韓獨立靑年團)에 가입하였다. 대한독립청년단은 성립 초기부터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 4월 상하이(上海)에서 수립된 임시정부는 원활한 독립운동을 수행하기 위해 한국 내와 연결시킬 수 있는 통신기구인 교통국을 설치하였다. 그해 7월 말 신의주 대안 지방인 안둥현에 교통부 안둥지부를 설치하고, 8월 하순에는 평북 의주군 교통국, 강변 8군(郡) 임시지방교통국, 임시 함경남도교통사무국, 콴뎬 통신국, 경성(京城) 교통국을 만들었다. 김승만(金承萬)·여순근(呂淳根)·김두만(金斗萬)·오학수 등과 관전통신국 설치에 참여하였다. 관전통신국은 인접한 안동지부 교통사무국과 연결되어 업무를 수행하면서 안둥현임시의사회(安東縣臨時議事會)를 조직하였다. 이 조직에도 참여하여 콴뎬현과 안둥현을 오가며 임시정부의 통신업무를 위해 일하였다. 서간도 지역의 두 지방 교통국이 체제를 갖추자 국내에 설치된 강변 8군 임시지방교통국의 세력 확장을 위해 1919년 9월 국내로 들어왔다. 강변 8군 임시지방교통국은 평북 삭주·창성·벽동·초산·위원·강계·자성·후창군 등을 대상으로 국내 활동을 위해 설치된 것이었다. 이들 8개 군은 압록강과 접해 있어 서간도에서 도강하면 첫 번째로 당도하는 지역들이었다. 따라서 만주나 상하이에서 파견된 교통국원들이 원활히 업무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이들 군에 많은 협력자들을 만들어야 하였다. 국내에서 교통국원을 모집하던 중 평양경찰서 소속 일제 경찰에 검거되어 문초를 받았다. 하지만 단지 사람을 만나고 다녔다는 것 이외 다른 단서가 나오지 않아 곧 석방되었다. 풀려난 후 강동군 삼등면(三登面)으로 가 독립운동에 참여할 동지들을 포섭해 정의단(正義團)이라는 단체를 결성하였다. 정의단의 단원 규모나 활동방향에 대해 밝힐 수 있는 자료는 아직까지 나오지 않으나, 활동상을 보아 강변 8군 지방교통국의 조직을 견고히 하고 임시정부를 지원하기 위한 단체로 판단된다. 따라서 이 단체를 구심점으로 동지들과 평양을 비롯해 평안남도 지역을 돌아다니며 군자금을 모금한 것으로 보인다. 이를 통해 약 17만원의 자금을 모아 임시정부에 보냈다. 이 같은 활동을 하고 있을 때, 1919년 11월 안둥현과 접한 콴뎬성 향로구(香爐溝)에 대한청년단연합회(大韓靑年團聯合會)가 성립되었다. 대한청년단연합회는 만주의 대한독립청년단이 주도해 국내외 청년단체들을 연합해 성립시킨 독립군단이었다. 대한독립청년단의 단원이자 임시정부 교통국의 국원이었으므로 자연히 연합회 회원이 되었다. 대한청년단연합회는 만주 지역과 한국 내의 독립운동단체를 연계하는 활동을 추진해 그 결과물로 임시정부를 지원하고, 임시정부 교통국의 업무를 수행하며, 일제의 수괴 및 친일파들을 처단하는 것을 주 활동으로 하였다. 청년단연합회는 이 같은 업무를 더욱 적극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임시정부와 협력해 한국 내에 보다 적극적인 독립운동 단체 설립에 나섰다. 안창호(安昌浩)의 주도로 상하이에 조직된 의용단(義勇團)의 한국 내 지단(支團)과 분단(分團) 설치에 앞장 선 것이다. 의용단 총무인 김석황(金錫璜)이 1920년 4월 평양으로 들어 와 지단과 분단 설치작업을 추진하였다. 그런데 이 일이 추진되기 이전 임시정부의 연락을 받은 청년단연합회는 김석황이 한국 내에서 활동하는 데 필요한 무기를 준비해 전달하고, 인원을 동원하는 임무를 맡았다. 이 사전 임무에 동원되어 김석황이 한국으로 들어오기 5개월 전인 1919년 11월 동지 김상만(金相萬)과 함께 폭탄을 반입해 국내 의열단체인 항일구국단(抗日救國團) 총무 여행열(呂行烈)에게 전달하였다. 이 지원에 힘입어 김석황은 평양 기홀병원(記笏病院)에 허위병명으로 가장하고 입원해 병원을 활동 근거지로 삼고 의용단 분단과 지단 설치작업을 추진하였다. 1920년 초 서간도 지역의 독립운동단체인 한족회(韓族會)·기원독립단(紀元獨立團)·민국독립단(民國獨立團)·평안북도독판부(平安北道督辦府) 및 대한청년단연합회가 통합해 콴뎬현에 본부를 마련하고 임시정부 산하의 광복군(光復軍)을 성립시켰다. 광복군은 참리부(參理部)·사령부(司令部)·군영(軍營) 등 하부기구를 조직하고, 특수부대인 광복군총영(光復軍總營)을 설치하였다. 광복군총영이 성립되자 중앙본부 비서 겸 모험대장의 직에 선임되었다. 광복군총영은 실전 경험을 가진 서간도 지역 여러 독립군단의 독립군을 통합해, 그 중에서 용맹스럽고 활기찬 의욕을 가진 인물들을 선발해 구성하였다. 따라서 대원들은 성립 초기부터 만주와 국내에서 일제 군경을 상대로 활발한 결전을 벌였고, 친일파 척결, 일제 침략기관 파괴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광복군총영 모험대장의 자격으로 다시 한국 내로 들어 와 활동을 전개하였다. 1920년 12월에는 서경록(徐庚祿)·안기화(安琪和)·이원보(李元甫) 등에게서 군자금 1,150원을 모금해 본부로 보냈다. 1921년 여름에는 평양의 대동강 월편(越便)에서 일제 경찰대를 기습 공격해 피해를 입히고 신속히 부하들을 이끌고 퇴각하였다. 그해 하순부터는 평남 강동군(江東郡)과 성천군(成川郡)을 무대로 일제 군경대(軍警隊)를 상대해 본격적인 무장활동을 펼쳤다. 이들 총영의 유격대원들이 여러 지역을 옮겨가며 기습해 오자 성천경찰서는 평남 각지 경찰병력을 지원 받아 1922년 1월 7일 새벽 독립군들이 근거지로 한 강동군 원탄면(元灘面) 삼성리(三成里)를 향해 총공세를 가해왔다. 총영의 대원들은 1백여 명의 일제 경찰대를 상대로 치열한 접전을 벌여 우에츠키(植月)를 비롯한 여러 명의 일제 경찰에게 중상을 입혔다. 그러나 월등한 무기와 병력에 밀려 다수의 부하 독립군과 함께 부상을 입고 접전지를 벗어나 퇴각하였다. 전투 후 일제 경찰대의 대대적인 수색이 진행되었고, 결국 1월 10일 제2 근거지로 삼고 있던 강동군 만달면 대성리에서 부상당한 몸으로 붙잡혔다. 이때 그동안 유격대를 지원했던 현지 지방조직원들을 포함한 대원 45명이 검거되었다. 일제는 유격대 근거지에서 광복군 부관복(副官服), 국내동포에게 고하는 경고문 258장, 권총실탄, 소도(小刀), 최급(最急)경고문 14장, 독립신문, 군자금영수증 1책, 자동권총 및 실탄, 포상장(褒賞狀) 36장, 신임장 30장, 광복군 용지 24장, 중앙기관 조직 보고서 1통 등을 압수하였다. 1922년 4월 19일 평양지방법원에서 징역 13년을 받고 옥고를 겪다가, 수감 중 감형되어 1931년 풀려났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채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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