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車千里

車千里

1897 ~ 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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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車千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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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남 숙천(肅川)만주방면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평안남도 숙천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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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독립장(1998)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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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장(1998) 평안남도 숙천군(肅川郡) 출신이다. 다른 기록에는 평남 안주군(安州郡) 또는 평북 강계군(江界郡)출신으로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자료에 따르면 1897년생으로 추정된다. 이명은 차재흡(車載洽)이다.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를 졸업하고, 백서농장(白西農莊)의 교관이 되어 후진을 양성하는 데 전력을 쏟았다. 이후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육군주만참의부(陸軍駐滿參議部, 이하 ‘참의부’) 등에서 독립군 간부로 부하들을 이끌고 국내로 진입해 친일파와 일제 침략자들을 척결하였다. 1910년 한일강제병합 후 압록강을 넘어 서간도 류허현(柳河縣)으로 갔다. 서간도의 류허·퉁화(通化)·콴뎬(寬甸)·지안현(輯安縣) 등은 1910년을 전후한 시기부터 민족운동가들이 독립운동기지로 개척을 시작한 지역이었다. 독립군양성을 위해 설립한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해 민족교육 및 무관교육을 받고 졸업하였다. 신흥무관학교 졸업 후 백서농장의 교관이 되었다. 일제를 비롯한 외부인이 쉽게 알아 볼 수 없도록 농장이라 이름붙인 백서농장은 본격적인 항일무장투쟁을 준비하기 위해 만들어진 조직체였다. 산속 깊은 고원평야인 퉁화현 빨리소(八里哨) 쏘배차(小北岔)에 1914년 설립된 백서농장의 장주는 김동삼(金東三)이었고, 훈독 양규열(梁圭烈), 총무 김정제(金定濟), 그리고 허식(許湜)·김영윤(金永胤)·김동식(金東植) 등이 교관을 맡았고, 3개 중대와 규율대를 편성한 고급 무관학교를 겸한 실전을 위한 군영(軍營)이었다. 1919년 3월 만세운동 이후에 중국 상하이(上海)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고, 서북간도에서는 그 동안의 준비를 바탕으로 항일무장활동을 수행할 독립군단(獨立軍團)들이 성립되었다. 서간도 독립운동가들은 1919년 3월 13일 이주한인의 자치활동과 독립운동기지 개척의 주관 기관인 부민단(扶民團)을 한족회(韓族會)로 명칭을 바꾸고 조직을 개편해 본격적인 항일활동 태세를 갖추었다. 한족회는 우선 독립전쟁을 전담할 군정부(軍政府)를 건립하였다. 그리고 그해 11월 임시정부와 협의해 군정부를 서로군정서로 이름을 고치고 임시정부 산하의 독립군단으로 자리매김하였다. 이와 같이 서로군정서는 최고지휘관인 독판(督辦)에 경북 안동(安東) 출신의 이상룡(李相龍)을 선임하였다. 또한 그 밑에 부독판 및 내무·법무·군무 등의 부서를 두고, 무장활동을 수행할 의용군을 따로 편성해 지청천(池靑天)을 사령관에 임명하였다. 이른 시기 서간도에 건너와 활동했던 관계로 한인사회의 속사정을 잘 알았다. 따라서 자치기관인 한족회의 검무관(檢務官)에 임명되었다. 또한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고, 백서농장 교관을 역임해 군사적인 지식이 풍부했으므로 서로군정서의 의용군에도 소속되었다. 의용군에서는 제1중대 2소대장에 임명되었으며, 용맹성이 뛰어난 대원 10여 명으로 구성한 암살대에 배치되어 항일무장활동의 최일선에 서기도 하였다. 다방면에서 활동했기에 일제는 행적을 끊임없이 추적하였다. 1920년 중반에는 지안현 대청구(大淸溝)에 암살대의 근거지를 마련해 활동하고 있었다. 이 지역은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한국과 접한 국경지역이었기에 수시로 국내로 진입해 유격활동을 펼쳤다. 이에 일제는 평안북도의 문흥(文興), 고산진(高山鎭) 일제 경찰대, 의주헌병대, 안둥(安東) 영사관 경찰대에서 차출한 병력으로 3개의 수색대를 구성해 그해 7월 19일부터 지안현을 수색해 들어 왔다. 7월 21일 일 수색대가 근거지인 대청구의 한족회원 한덕수(韓德洙)의 집을 기습해 들어 왔다. 그러나 이들이 기습해 왔을 때는 이미 대원들은 모두 피신하고 난 뒤였다. 이어 다음날 일본군 수색대는 근거지 중의 또 다른 한 곳인 대청구 상동(上洞)에 있는 한족회 구정(區正) 김낙겸(金洛兼)의 집을 기습하였다. 그러나 이곳에서도 암살대 대원들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이에 일본군 수색대는 독립군을 지원하고 숙식을 제공하였다는 이유를 들어 가옥내에서 식량과 모든 가재도구를 꺼내 불태웠다. 일본군 수색대의 추격은 같은 달 26일까지 이어졌다. 일제의 이러한 압박이 있었지만, 국내로 진입해 친일파 및 침략수괴와 기관을 공격하는 유격활동을 이어갔다. 1920년 11월 4일에는 부하 대원 10여 명을 이끌고 평북 강계군 어뢰면(漁雷面)으로 진입하였다. 공격 목표를 위해 참성동(站城洞) 판막참(板幕站)의 산길을 이동하던 중 평안북도 각 경찰서에서 차출된 경찰들로 구성된 일제의 연합수색대와 마주치게 되었다. 유격대는 이 경찰대와 장시간에 걸친 교전을 펼쳐야 하였다. 결과는 수적으로 절대적 열세에 몰려 대원 2명이 사망하였고, 나머지 대원은 험악한 산중으로 피신하였다가 어렵게 본부로 돌아와야 하였다. 1921년 4월에는 부하 대원들과 퉁화현 7도구(道溝)에 있는 친일기관 보민회(保民會)사무소를 습격하였다. 일제의 밀정들이 모여 있는 친일기관을 없애 독립군의 비밀정보가 누설되지 않도록 한 다음 국내 진입전을 수행하기 위함이었다. 사무소와 함께 친일의 무리들까지 척결한 후, 농민으로 변장한 대원을 일경찰대가 주둔한 압록강변의 황백전자(黃栢甸子)로 보내 동정을 파악하도록 하였다. 유격대원들을 이끌고 국내와 만주에서 이 같은 활동을 벌이고 있는 동안 서북간도의 독립군과 한인사회는 큰 시련을 맞고 있었다. 1920년 8월 일제가 ‘간도지역불령선인초토계획(間島地域不逞鮮人剿討計劃)’을 세우고 20,000명의 일본군을 동원한 ‘경신참변(庚申慘變)’을 일으켰다. 1920년 10월 초부터 이듬해 4월까지 서북간도의 독립군근거지와 한인사회를 돌아다니며 초토화시켰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보이는 대로 죽일 뿐 아니라 한인 가옥·학교·교회 등은 소각해 잿더미로 만들었다. 일본군의 만행으로 인하여 유격활동이 어려워졌다. 최고지휘관 이상룡은 일본군의 공격을 피해 산중으로 들어가야 하였고, 간부 및 대원들도 흩어지고 말았다. 이에 1921년 중반, 암살대 대장인 신광재(辛光在) 및 이병철(李秉鐵)·채찬(蔡燦)등과 힘을 합해 의용군의 진용을 갖추는 작업을 수행하였다. 새로 갖추어진 의용대는 대장에 신광재, 내무반(內務班) 반장에 이병철, 부반장 권영무(權永武), 외무반(外務班) 반장 채 찬, 부반장 차천리, 경비대 대장 이지홍(李芝弘) 등이었고, 본부는 린장현(臨江縣) 홍토애(紅土崖)에 두었다. 1921년 후반기에는 노령의 이상룡을 대신해 일시적으로 서로군정서의 독판대리(督辦代理)를 맡기도 하였다. 이때 남만주(南滿洲)에 근거지를 둔 여러 독립운동 단체들이 통합의 움직임을 보였다. 1922년 봄, 서로군정서를 비롯한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광한단(光韓團) 등의 대표들이 환런현(桓仁縣)에 모여 회의한 결과 통합 독립군단인 대한통군부(大韓統軍府)를 결성하기로 합의하였다. 이어 그해 8월에는 통군부에 참여하지 않은 단체들까지 다시 참여시켜 17개의 독립운동 기관을 통합해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를 결성하였다. 통의부 최고지휘관은 한족회와 서로군정서의 핵심 간부 중의 한명이었던 김동삼(金東三)이 선임되었다. 이 시기 서로군정서 역시 통의부 통합에 참여했지만, 구성원 전체가 가담한 것은 아니다. 신광재와 함께 통의부로 가지 않고 계속해서 서로군정서에 남아 항일활동을 펼쳐 나갔다. 1923년 6월, 부하 대원들을 거느리고 평안북도로 진입하였다. 강계군과 후창군(厚昌郡)으로 이동해 일제의 영림서(營林署)와 연광(鉛鑛) 등을 습격해 군자금을 모집하고 무기를 전리품으로 챙겼다. 같은 해 9·10월 경에는 일제의 강계경찰서를 폭파시키고자 부하 대원들을 노동자로 변장시켜 압록강을 넘게 하였다. 이어 11월 또 다시 평북 강계와 자성(慈城)·후창까지 이동하며 일제의 주재소·헌병대 등을 습격하고 밀정을 처단하였으며, 일제 경찰대와 교전을 벌였다. 서로군정서 의용대를 이끌고 이러한 활동을 벌이고 있을 때, 통합 독립군단으로 출범한 통의부 내부에 변화가 일어났다. 1922년 후반 복벽주의(復辟主義)를 이념으로 가진 전덕원(全德元)계열이 공화주의자들인 양기탁(梁起鐸)·현정경(玄正卿) 등을 공격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리고 마침내 1923년 초 대한의군부(大韓義軍府)를 조직해 분리해 나갔다. 이어 1924년 초에는 채찬·박응백(朴應伯) 등이 임시정부 요인들과 합의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참의부를 성립시켜 통의부에서 분리해 나갔다. 참의부는 임시정부 직속의 독립군단임을 선포하였다. 서로군정서를 존속시키며 활동을 이어가던 중 참의부가 성립되자 이에 가담하였다. 참의부 성립 초기 별동대장(別動隊長) 및 소대장에 임명되었다. 그 밖의 간부진은 참의장 겸 제1중대장 채찬, 제2중대장 최석순(崔碩淳), 제3중대장 최지풍(崔志豊), 제4중대장 김창빈(金昌彬), 제5중대장 김창천(金蒼天) 등이었다. 참의부에서도 여전히 유격활동에 주력하였다. 1924년 (음)4월 부하 대원들을 이끌고 평북 강계군으로 진입해 군내(郡內) 친일 부호들의 집을 돌며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이어 같은 소대장으로 동일한 시기 조를 나누어 따로 출발했던 장창헌(張昌憲)대와 만나 강계군 곡소면(曲沼面) 쌍부동(雙富洞)으로 갔다. 그곳에는 독립군의 동정을 일제에 밀고하는 친일행위를 넘어 총을 들고 직접 독립군과 대적하는 친일파 백봉기(白鳳琦)란 인물이 살고 있었다. 연합 유격대가 도착했을 때도 백봉기는 일제의 침략기관을 보호하기 위해 경계근무에 나가고 없었다. 이에 유격대원들은 그의 아들 둘을 처단하고 가옥에 불을 놓아 전소시키고 돌아왔다. 같은 해 7월 13일에는 10여 명의 대원들을 이끌고 강계군 공북면(公北面) 향하동(香河洞)으로 향하였다. 이곳에서도 역시 친일행위로 악명 높은 김용준(金龍俊)의 집을 습격해 그와 부인을 처단하고, 가옥은 불을 태워 없앴다. 또 같은 마을의 친일파 김봉서(金鳳瑞)의 집으로 향했으나 유격대의 침입을 눈치 채고 달아나고 없어 가옥을 방화하고 철수하였다. 이 같은 활동을 벌이고 있던 중 같은 해 (음)6월 13일 소대장 장창헌이 대원 3명과 강계군 종서면(從西面)으로 이동하다 친일 무리들의 밀고를 받고 동원된 일제 경찰대와 황청동(黃淸洞)에서 접전을 벌이다 전원 전사하고 말았다. 이에 그 복수를 위해 8월 같은 소대장인 이응서(李應瑞)와 함께 14명의 대원을 7명씩 2개조로 나누어 강계군으로 진입하였다. 같은 달 8월 22일 밤, 고산면(高山面) 연상동(延上洞)에 거주하는 친일파 김오규(金五奎)의 집으로 이동해 그와 그의 둘째 아들의 집에 방화해 두 채의 집을 전소시켰다. 8월 29일에는 같은 군의 종서면 황서동(黃西洞)으로 이동해, 장창헌 일행의 한국내 잠입활동을 직접 밀고해 전사하게 만든 친일의 무리들인 이정호(李貞浩) 및 그의 장남 이경현(李庚鉉)·김성노(金成魯)·한승항(韓承恒) 등을 마을의 상여 보관창고로 끌고 가 전원 처단하였다. 그리고 같은 마을에 거주하는 자들 가운데 이들 친일파를 지원하는 12명을 색출해 다음 날 아침이 밝아 올 때까지 그들 소유의 열두 채의 가옥에 불을 놓아 소각시켰다. 이어 9월 4일에는 강계읍에 거주하는 밀정 박명호(朴明浩)를 붙잡아 처단하고, 같은 달 27일에는 강계군 공면(公面) 고대동(古臺洞)으로 이동해 그 곳에 거주하는 밀정 권영팔(權永八)과 계용희(桂龍熙)·윤정설(尹禎卨) 등을 권총으로 처단하였다. 1926년 초, 참의부의 중앙조직 재정비에 의해 중앙호위대장에 임명되었다. 이어 그해 말경에는 제1경비대장에 임명되어 서로군정서 시기부터 직접 구축해 국내 진입전의 전초기지로 삼았던 린장현(臨江縣) 홍토애에 근거지를 구축하였다. 그리고 이를 발판으로 이전과 같이 압록강을 넘어 국내에서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1926년 하반기부터 독립운동계의 대통합을 목표로 한 민족유일당(民族唯一黨)운동이 일어났다. 만주 독립운동계도 이에 호응하여 여러 노력을 시도하다, 1928년 9월에는 참의부·정의부·신민부(新民府) 등 3부(府)를 통합시키기 위한 통일회의가 지린(吉林)에서 개최되었다. 그러나 이 회의는 각 단체 대표들 간에 이견이 표출되어 큰 성과를 얻지 못하였다. 게다가 참의부는 대표로 참가한 김소하(金篠厦)가 변절하였다 하여 내부적으로 대표자격 시비가 생겼다. 이러한 요인들로 통일회의는 무산되고 말았다. 성과 없이 끝난 통일회의는 참의부 내부 노장파와 소장파 간의 갈등으로 번졌고, 통일회의 참관을 위해 지린에 와 있다가 반대파의 저격으로 사망하고 말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채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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