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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인명사전 - 한국독립운동정보시스템

미상 ~ 1918. 1.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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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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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단체

  • · 상항친목회
  • · 대동교육회
  • · 대동보국회
  • · 상해지방연회

포상 정보

  • · 애족장(1995)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5) 1900년대 미주에서 활동했던 인물로 생년월일과 출신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장홍법(張鴻法)으로도 불렸다. 1903년 9월 22일 안창호(安昌浩)·이대위(李大爲)와 상항친목회(桑港親睦會, 샌프란시스코 친목회)를 조직한 9명 중 한 명으로, 동포 간 긴밀한 연락과 권익보호를 담당하였는데, 주로 로스앤젤레스 근교 한인 간의 연락을 담당하였다. 1904년 캘리포니아주 패서디나(Pasadena)의 그린호텔에 한인 10명을 취직시켰다. 한인 동포들이 기숙할 곳을 마련하러 집을 보러 다니기도 하는 등, 동포들의 생활기반을 마련하는 데 힘썼다. 그중에는 유학생 방사겸(方四兼)도 있었는데, 방사겸을 로스앤젤레스로 직접 데려와 단체 조직과 활동을 함께하며 조력자로 삼았다. 1905년 을사늑약 체결 소식을 듣고 12월 9일 패서디나에 대동교육회(大東敎育會)를 조직하고, 총무직을 맡아 한인의 민족교육에 힘썼다. 샌프란시스코로 오는 한인의 수가 늘어나자 패서디나에 두었던 대동교육회 중앙회를 샌프란시스코로 옮겨 한인 이민자들의 접근성을 높여주었다. 한인 유학생들의 일자리를 알선하고 숙식을 제공하는 등 실질적으로 조직을 이끌었다. 부인 또한 부인회 서기로 갈 곳이 정해지지 않은 한인들을 집에 거두어 일자리를 마련해주는 등 남편과 함께 동포들의 생활을 도왔다. 1907년 대동교육회를 대동보국회(大同保國會)로 개편하여 교육에 중점을 두었던 활동을 정치운동으로 확장하였다. 초대 중앙총무에 선임되어 총회장 이병호(李秉浩) 등 24명과 독립운동을 이어갔다. 기관지 『대동공보(大同公報)』 주필을 맡았다. 샌프란시스코·로스앤젤레스·시카고·뉴욕 등지를 다니며 한인의 상황을 살피고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데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대동보국회 회원들을 각 지방으로 파견하여 일자리를 알아보도록 하였다. 1907년 9월 상항청년회 연설에서는 “학교를 가지 못할지라도 정신적으로 영웅을 본받으라”면서 청년들의 독립운동 정신을 강조하였다. 9월에는 상하이(上海)로 건너가 11월 24일 상하이 애이근로(愛以近路) 균익리(均益里) 5가 114호에 상해지방연회(上海地方聯會)를 조직하였고, 청나라 보황회(保皇會) 계열의 후원을 받아 활동하였다. 상하이에 체류하면서 동포들과 순한문 월간 잡지 『태동신보(泰東新報)』를 창간하였다. 1910년 2월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을 모색하여 대동보국회를 국민회(國民會)와 통합,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로 출범하였다. 이후 시카고에 주택을 얻어 부인과 딸과 생활하다가 오스트레일리아(Australia)로 건너가 인삼장사를 하며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였다. 미국으로 돌아온 후에도 미국 각지·상하이·블라디보스토크·싱가포르 등지를 순방하며 해외동포들을 격려·지원하였다. 1918년 1월 31일 싱가포르 여행 중 사망하였다. 『신한민보(新韓民報)』는 1918년 3월 28일자 기사를 통해 사망 소식을 알리고 약력을 소개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이하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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