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득부
全得富1883. 4. 15 ~ 미상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공립협회
- · 대한인국민회
- · 구미주차위원부
포상 정보
- · 건국포장(2012)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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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포장(2012) 1883년 4월 15일 함경남도 문천군(文川郡) 명호면(明湖面) 석전리(石田里)에서 전석호(全錫浩)와 어머니 이씨(李氏)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형은 무락(武洛)이다. 미국에서 문그레이스와 결혼하였다. 결혼 당시 그레이스는 딸 문로라가 있었고, 결혼 후 남편 성을 따라 전그레이스로 개명하였다. 1남 1녀를 두었다. 1897년 10월 고향에서 평안남도 평양(平壤)으로 이주하여 1906년 4월까지 과자점 등에서 일하였다. 1906년 5월 중국 상하이(上海)로 건너가, 1907년 9월 4일 홍콩마루(香港丸) 편으로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여 요리사 등으로 일하는 한편, 공립협회(共立協會) 샌프란시스코지방회[(桑港地方會)]에 참여하였다. 1908년 10월 공립협회가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등지에 독립군기지 개척을 위한 재원을 마련하려 하자, 김종림·황사용 등 31명과 아세아실업주식회사를 설립하고 자본금 2만 달러를 모집하였다. 그해 10월 샌프란시스코지방회 구제원으로 선임되었고, 12월에는 응접원으로 선출되었다. 1909년 6월 국민회(國民會) 북미지방총회 산하 샌프란시스코지방회 재무로 선임되었다. 1910년 8월 김필권·선우탄과 함께 한인 양찬관(서양음식점) 영업을 시작하였고, 11월에는 샌프란시스코지방회 평의원으로 선정되었다. 1911년 3월 총무로 선정되었으나 7월 사임하였다. 9월에는 장인환 의사의 스티븐스 사건에 관한 문서와 재정을 관리하기 위해 조직한 공동회 사무원을 사직하였다. 1913년 11월 여관 겸 노동소를 설립하고 일자리 알선과 숙식 제공 등을 하였다. 1914년 4월에는 신한·양주은과 양복점을 개업하면서 태극기와 국민회기 등도 만들어 팔았다. 8월 국치기념식 예식준비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15년 6월 샌프란시스코지방회 재무직을 사임하였으나, 1916년 2월 샌프란시스코지방회 총무로 선임되었다. 1919년 1월에는 김승길과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에서 백인이 경영하던 식품상점을 매입하여 서울식물상점을 개업하고, 동양에서 물품을 수입·판매하였다. 1919년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4월 대한인국민회 샌프란시스코지방 수전위원으로 독립금을 모집하였다. 또한 5월부터 10월까지 국민회의 샌프란시스코 파출소 위원으로 임명되었다. 1918년 11월부터 1919년 12월까지 국민회를 후원하기 위해 대표의연금·독립의연금·사례금·애국금·공채표 등 150달러를 기부하였다. 1920년 2월 국민회 북미지방총회 구제원으로 임명되었고, 북미실업회사 주주로 1,000달러를 투자하였다. 5월에는 샌프란시스코지방회 재무와 구미주차위원부(歐美駐箚委員部) 지방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2월 23일에는 흥사단에 입단하여 제119 단우가 되었다. 1921년 1월 북미지방총회 실업부원으로 임명되었다. 1922년 11월 1923년도 샌프란시스코지방회 실업부원으로 선출되었고, 1923년 1월 샌프란시스코한인교회 에워드청년회 인제국장으로 선출되었다. 그해 2월 양화점을 시작하였다. 1923년 5월 민립대학기성후원회에 참여하였고, 그해 6월에는 샌프란시스코지방회 부회장으로 선임되었다. 1924년에는 샌프란시스코지방회 법무원으로 활동하였다. 1924년 스탁톤으로 이주하여 1930년까지 거주하였다. 1925년 3월 이대위(李大爲) 등과 스탁톤지방회를 설립하였으며, 1926년과 1927년 연이어 스탁톤지방회 총무로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1927년 11월에는 박대일 등 20여 명과 한인공제회를 조직하고 이사원으로 선출되었다. 1930년 4월 샌프란시스코로 돌아온 뒤, 목욕탕을 개업하였다. 1931년 샌프란시스코지방회 구제원으로 선임되는 한편, 국민회 총회 구제원으로도 선정되었다. 그해 12월 대한인공제회 연환회에서 이사회 총무로 선정되었다. 1932년 1월 국민회총회 구제원으로 선정되었다. 1933년 샌프란시스코지방회 재무로 선임되었으며, 1933년과 1934년 2년동안 대한인공제회 이사로 활동하였다. 1934년 1월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하였다. 1934년 11월과 1936년 7월 두 차례 흥사단 로스앤젤레스 지방대회에 출석 단우로 선정되었으며, 1939년 12월 로스앤젤레스지방회(羅城地方會)에서 차기년도 집행위원 및 구제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40년 9월 딜라노(Delano)로 이주하였고, 그해 11월 딜라노지방회 지방대회에서 차기년도 감찰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941년 11월 순국선열기념식에서 헌화하였고, 12월 차기년도 감찰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42년 3월 로스앤젤레스에서 거행된 3·1경축 기념식에 부인과 참석하였으며, 1943년 1월에도 딜라노지방회 감찰위원으로 활동하였다. 3월 샌프란시스코에 양찬관을 매입한 뒤,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하였고, 1946년에는 조선민족혁명당 미주지부 기관지 『독립』의 회원으로 활동하였고, 1963년 5월까지 흥사단 단우로 활동하였다. 그 동안 독립금으로 1942~1945년 10회 195달러, 광복군 후원금으로 50달러, 군사운동금으로 50달러, 3·1기념금으로 10달러, 국민의무금으로 26회 245달러, 보조금 7회 86달러, 기본금 15달러 등 약 700여 달러에 이르렀다. 이외에도 1919년 특별의연금 100달러, 국민회 총회관 건축의연금 150달러, 신한민보사 식자기계 의연금 100달러 등을 기부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2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김도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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