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學純
學純1843. 7. 7 ~ 1910. 12.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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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독립장(1962)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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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장(1962) 1843년 (음)7월 7일, 충청남도 공주군(公州郡) 대장리(현 공주시 계룡면 하대리)에서 아버지 이순제(李順濟)와 어머니 광산김씨(光山金氏)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자는 경실(京實), 호는 회천(晦泉)이다. 김장생(金長生)과 송시열(宋時烈)의 학통을 계승했으며, ‘존화양이(尊華洋夷)’에 철저한 유학자였다. 독학으로 일정한 학문적 성과를 거둔 후 아들 이내수(李來修)와 함께 송병선(宋秉璿) 문하에 출입하며 가르침을 받았다. ‘화이(華夷)·충역(忠逆)·의리(義利)’의 분별에 엄격했으며, 제자들에게도 항상 ‘의리(義理)’를 강조하였다. 따라서 성리학 이외의 학문이나 사상에 대해서는 배타적이었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 당시 동학교도들이 찾아와 협조를 구했으나 엄중하게 꾸짖었다. 그러자 동학교도들이 아들인 이내수에게 악형(惡刑)을 가하며 협조를 구하자 독약을 먹고 자결을 시도하며 동학교도들을 돌려보냈다. 1908년 충남 논산(論山)에서 개신유학자들이 돈암서원(遯巖書院)에 신교육을 실시하기 위해 사립 찬명학교를 세우려 하자, 돈암서원과 각 지역의 향교와 서원, 태학에 학교설립의 부당함을 알리는 서한을 보냈다. “옛 학교는 예의를 상선(相先)했으나 지금의 학교는 예의를 박상(剝喪)하고, 옛 학도는 성현을 사모했으나 지금의 학도는 성현을 훼척(毁斥)한다”며 학교를 세우려는 이들을 ‘사문난적(斯文亂賊)’이라 비판하였다. 찬명학교가 개교식을 열자 뜻있는 유학자들과 함께 찾아가 학교 설립 주도자를 꾸짖었으며, 1909년 2월 찬명학교 설립을 반대하는 글을 『대한매일신보』에 게재하기도 하였다. 일제의 침략이 가속화되자 “하늘이 만약 이 나라를 보호하지 않는다면 금화산인(金華山人)이 되겠다”며 충남 연산(連山)의 대명산(大明山) 아래 한양촌(漢陽村)으로 들어가 은둔자정(隱遁自靖)했다. 산의 이름인 ‘대명’과 마을 이름인 ‘한양’을 좋아했기 때문이며 의리와 충군애국의 절개를 지키겠다는 뜻이었다. 1910년 경술국치 후 일제가 은사금을 내렸으나 거부했으며, 연산의 헌병대장이 은사금을 수령을 위해 몇 차례 초빙했으나 응하지 않았다. 헌병대장이 직접 찾아오자 “조선국의 일민(逸民)이다. 불행하게도 늙은 나이에 나라가 망하고 군주가 욕을 당하였다. 한번 싸워 볼 계책도 세우지 못하였고, 자결해 절개를 세우지도 못했으니 내 죄는 만번 죽어도 마땅하다. 원수의 나라에서 불의의 돈을 주지만, 의로써 그것을 받지 않을 것이다. 만약 다시 가지고 온다면 서산(西山)에 들어가거나 동해(東海)에 빠져 죽을 것이다”라며 은사금을 수령을 거부하였다. 일제는 투옥시키고 죽이겠다고 협박했으나 의지는 더욱 강고했으며, 투옥 중에도 단식을 하며 일제를 꾸짖기까지 하였다. 일제는 의지를 꺾지 못하자, 아들인 이내수와 이내준(李來俊)에게 부친의 설득과 은사금 수령을 강요했으나 두 아들도 이를 거부하였다. 이내준은 “나의 머리와 너의 임금의 머리를 바꾼다면 가능한 일이나 그렇지 않으면 돈을 받지 않을 것이다”며 거절했다. 손자 이욱(李旭)도 “조부께서 돌아가신다면 의로운 일이다. 내가 어찌 너희들이 주는 돈을 받아 조부께 누를 끼치겠는가”라며 뜻을 같이하였다. 일제가 나이가 많고 병이 심한 것을 보고, 몸을 돌보라며 잠시 풀어주자 절명시(詩) 2수를 남기고 1910년 (음)12월 7일 음독(飮毒) 자결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이성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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