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正奎
正奎1864. 4. 7 ~ 1945. 11. 20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전기의병(유인석 의병부대)
포상 정보
- · 애국장(1990)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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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장(1990) 1864년 4월 7일 충청북도 제천군(堤川郡) 제천면(堤川面) 흑석동(黑石洞)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평창(平昌)이며, 자는 치심(致心)이고 호는 항재(恒齋) 또는 옥산(玉山)이다. 이명은 이장규(李章奎)이다. 집안은 소론 계열이었으나 송시열(宋時烈)의 학문에 감화되어, 이후 위정척사파의 활동에 참여하였다. 안승우(安承禹) 등과 교유하였으며, 제천 장담(長潭, 현 제천시 봉양읍 공전리)에 머물던 유인석(柳麟錫)의 제자가 되었다. 둘째 형인 이용규(李容奎) 역시 의병부대를 도왔고, 안승우가 제천 남산성 전투에서 사망하자 시신을 수습하였다. 1895년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단발령이 시행되자, 박정수(朴貞洙)·주용규(朱庸奎) 등과 함께 유인석을 따라 중국으로 가고자 하였다. 하지만 안승우·서상렬(徐相烈) 등의 권유로 유인석 의병부대에서 참모로 병력과 양곡을 관리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한편 개화정책을 따른 백성은 용서하고 관료는 참하자고 주장하였다. 또한 가흥창(可興倉) 전투의 패전 등에서 한동직(韓東直) 등의 장수에 대한 관대한 처분과 정치적 배려를 주장하는 등 참모로서 활동하였다. 아관파천 이후 친일내각이 붕괴하였으나 개화정책은 속행되어 의병부대는 여전히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 가운데서 평소에 친분이 있던 전 판서(判書) 심상훈(沈相薰)의 권유로 고종을 비롯하여 김병시(金炳始) 등의 대신에게 의병의 처지를 전달하는 업무를 담당하였다. 그러나 그 와중에 의병부대가 큰 패배를 당하고 안승우 등이 사망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지병이 발작하여 제천에서 요양하였다. 이후 유인석이 중국으로 이동하자, 5~6개월간 제천과 청풍군(淸風郡, 현 제천) 일대에서 은신하였다. 1901년부터 1902년까지는 유인석 의병부대의 대의를 밝히기 위한 『소의신편(昭義新編)』의 간행에 주력하였다. 1904년에는 유인석이 향약을 조직하여 향촌과 운동조직을 정비하고자 할 때 장의(掌議)로 선임되었고, 동료들과 함께 친일단체 일진회(一進會)의 향촌 활동을 저지·차단하고자 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인해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박탈당하자 많은 유림들이 다시 의병을 일으키는 것을 논의하였다. 1906년 2월에는 유인석의 지시로 최익현(崔益鉉)을 찾아가 남과 북에서 각기 군사를 일으켜 호응하기로 하고, 연락하는 업무를 수행하였다. 또한 이재윤(李載允)과 협의하여 정병철(鄭丙喆)·한희섭(韓熙燮) 등과 함께 중국 서간도와 지린(吉林)으로 도움을 청하러 파견되었다. 1907년 1월에는 유인석의 지시로 서울에 머물며 형세를 탐문하였다. 한편 1907년 한일신협약(정미7조약)의 체결 이후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되자, 해산 군인들이 의병에 합류하여 의병전쟁이 더욱 치열해졌다. 그 와중에 이강년(李康秊) 의병부대가 제천으로 입성하고, 종군을 권유하며 참모 겸 사서(司書)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스승의 행적을 찾기 위해 서울로 들어가 유인석을 찾아 동료들과 함께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피신시켰다. 이후 유인석의 지시로 서울에 잔류하며 연락 업무를 담당하였다. 1910년 4월에는 평북 영변군(寧邊郡)으로 가서 연락 업무를 진행하던 중, 동료들이 붙잡혔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중국 펑톈성(奉天省) 선양(瀋陽)으로 피신해 애국계몽운동 계열의 양기탁(梁起鐸)·이동녕(李東寧) 등과 함께 활동하였다. 1911년 4월에는 국내로 귀환하여 제천·충주(忠州) 등지에서 후학을 교육하고 자양영당(紫陽影堂)의 운영에 힘썼으며, 『종의록(從義錄)』 등을 저술하여 의병운동의 사적을 남기는 것에 주력하였다. 개인 저서로 『항재집(恒齋集)』이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구열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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