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春永
春永1868 ~ 1896. 1. 13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호좌 의병부대
포상 정보
- · 독립장(1963)
관련 사건
- · 을미의병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독립장(1963) 경기도 양평군(楊平郡) 지평면(砥平面) 출신이다. 기록에 따르면 1868년생으로 추정된다. 본관은 덕수(德水)이며, 자는 우삼(友三), 호는 괴은(槐隱), 이명은 다른 한자의 이춘영(李春英)이다. 영조대(英祖代) 판돈령부사를 역임한 이기진(李箕鎭)의 직계 5세손인 이민화(李敏和)의 2남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대대로 지평에서 거주하면서 양평, 여주(驪州), 원주(原州), 제천(堤川) 일대에 관계망을 형성한 유력 가문이었다. 할머니는 여흥 민씨(驪興閔氏)로 참판(參判)을 지낸 민치문(閔致文)의 딸이었으며, 승지(承旨)를 지낸 연안 김씨(延安金氏) 김재익(金載翼)의 외손이었다. 1895년 명성황후(明成皇后)가 시해되고, 그해 11월에 단발령(斷髮令)이 공포되자, 이에 반발하여 의병운동을 주도하였다. 1896년 1월 4일을 전후하여 거의(擧義)를 결심하고 지평에서 대대로 살아왔던 안승우(安承禹)의 부친 안종응(安鍾應)을 찾아가 의병 봉기를 논의하였다. 이와 함께 원주 안창(安昌)의 처가에도 연락을 취해 의병 봉기에 대해 논의하였고, 김사정(金思鼎)·김사두(金思斗) 등이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또한 지평 포군의 영수 김백선(金伯善)을 찾아가 의병운동에 동참시킴으로써 실질적인 전투력인 포군을 확보하였다. 의병 봉기가 구체화되자 안종응의 연락을 받은 안승우(安承禹)도 참여하였다. 이로써 ‘처의삼사(處義三事)’ 거의에 이필희(李弼熙)·이범직(李範稷) 등의 화서학파 인사들도 함께 의병운동을 전개할 수 있게 되었다. 1896년 1월 12일 김백선·김사정 등과 함께 원주 안창에서 봉기하였다. 봉기 직후 원주관아 점령을 1차 목표로 삼고 원주군수 이병화(李秉和)에게 군량을 요청한 후 그날 밤 원주 관아로 진격하였다. 하지만 이병화는 충주관찰부로 피신하고 없었다. 제천에서 합류한 안승우·원철상(元哲常)·신지수(申芝秀) 등은 형조판서(刑曹判書)를 지냈던 김세기(金世基)를 찾아가 군량을 요청하고 하루 늦은 1월 13일에 의병부대에 합류하였다. 원주 관아를 점령한 후에는 필요한 군수물자를 보충하는 등 의병부대를 보강하였다. 또한 원주 포군 영수 박운서(朴雲瑞)에게 포군을 모집토록 하였다. 당시 일본군 가흥(佳興)병참수비대는 출병을 하지 못하고 원주지역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1월 17일 오전 5명의 정찰병을 파견하였다. 1차 목표를 달성한 후 의병지도부는 다음 목표로 충주성을 점령하기로 결정하였다. 충주성 점령은 관찰부 점령이라는 상징성과 함께 서울-부산간 군용전신선을 차단함으로써 친일내각과 일본공사관을 압박할 수 있었다. 따라서 부대를 제천으로 이동하기로 하고, 원주에서 추가적인 의병모집을 위해 김사정·박운서 등을 남겨두었다. 1월 17일 의병부대가 제천에 입성하자, 거의를 주장하였던 이필희·서상렬(徐相烈)·오인영(吳寅泳)·배시강(裵是綱) 등 화서학파 인물들이 대거 가담하였다. 이에 따라 의병부대에 대한 재편성을 실시하였고, 이때 의병부대의 모든 사무를 총괄하는 중군장에 임명되었다. 의병장 이필희, 군사(軍師)는 서상렬, 군무도유사(軍務都有司)는 안승우, 선봉장은 김백선, 서기는 원용정(元容正)이 맡았다. 한편, 조정에서는 1월 18일 조칙(詔勅)을 내어 내부협판 유세남(劉世南)을 선유사로 원주에 파견하는 동시에 전주(全州)로 행군 중인 친위대 1개 중대를 충청도로 급파하였다. 그리고 1월 24일 추가로 1개 중대를 안동(安東)으로 출병시켰는데, 충주(忠州) 부근에서 의병 상황에 따라 앞서 보낸 1개 중대와 연합하여 진군토록 하였다. 재정비한 의병부대는 친위대 1개 중대가 출병했다는 소식에 단양(丹陽)으로 이동하였다. 단양이 친위대의 공격을 방어하기가 비교적 쉽고, 추가적인 포군 모집활동이 가능하였기 때문이었다. 1월 19일 단양으로 들어온 의병은 단양군수 권숙(權潚)을 생포하여 감금하였다. 그런데 다음 날에도 원주에서 추가 병력이 오지 않자 안승우는 한 부대를 이끌고 제천으로 돌아와 병력을 기다리면서 자체적인 모집활동을 전개하였고, 이때 다른 의병들과 함께 단양 장회협(長匯峽)에서 매복하고 있었다. 1월 22일 장회협에서 친위대와 의병 사이에 전투가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이 전투에서 지평포군을 이끌고 장회협의 지리적 이점을 최대한 이용해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장회협 전투에서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원주에서 병력이 오지 않은 것에 대한 불만과 불안감이 의병들 사이에 퍼지면서 심각한 동요가 일어났다. 이에 의병지도부의 일원으로 의병부대의 안정화와 안동을 비롯한 경북지역 의병들과 위해 영남으로 이동하였다. 하지만 영남으로 이동하면서도 계속해서 의병들이 이탈하자 이필희로부터 군사권을 넘겨받았다. 호좌 의병부대를 위해 2월 5일 영월(寧越)로 들어왔다. 2월 7일 유인석(柳麟錫)을 총대장으로 하는 호좌 의병부대가 출범하였고, 이때 여러 가지 군무를 담당하는 중군장에 임명되었다. 중군에서 직할하는 전투부대장인 선봉장에는 김백선이 임명되었다. 부대정비를 마친 호좌 의병부대는 제천으로 진격하였다. 먼저 김백선이 선봉에 섰으며, 김백선의 뒤를 쫓아서 대진을 이끌었다. 안승우·홍대석(洪大錫) 등의 부대가 동면(東面)을 거쳐 진격하였고, 안성해(安成海)·신지수 등의 부대가 현우면(縣右面)을 거쳐 진격하였다. 2월 12일 호좌 의병부대는 제천에 입성하였다. 유인석은 단발을 강요한 단양군수 권숙과 청풍(淸風)군수 서상기(徐相夔)를 처형하고, 충주성 공격을 위해 2월 16일 4천명의 군사를 이끌고 원서(院西)에 주둔하였다. 충주에는 경군(京軍) 400여 명, 진위대 500여 명, 일본군수비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전면전을 전개할 경우 의병의 피해가 막대했기에 미리 포섭해 둔 지방대 두령들과 내응하여 충주성의 실정을 파악하였다. 사전 준비작업을 마친 의병부대는 2월 17일 남한강 상류인 북창나루를 건너 충주성을 공격하였는데, 김백선의 선봉대와 함께 중군을 이끌면서 앞장서서 진격하였다. 이때 포섭된 지방대 두령들이 성문을 열어 의병의 충주성 진입을 용이하게 하여 일본군과 경군의 저항을 격퇴하고 충주성을 장악하였다. 충주를 점령한 후 일본군의 병참선을 끊어버리고 영·호남지역 의병과 연합하여 일제의 침략을 물리치자고 주장하였다. 이를 위해 구체적으로 수안보(水安堡)에 있는 일본군 병참을 공격하기 위해 여러 차례 사람을 보내 수안보 지역을 정탐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유인석에 의해 받아들여져 실행에 옮겨졌다. 가흥 쪽으로 물러났던 일본군이 2월 23일 달천(㺚川)을 넘어 쳐들어왔다. 유인석으로부터 중군장으로서 중군을 이끌고 충병하도록 명령을 받았다. 이에 중군을 이끌고 일본군을 격퇴하였고, 가흥 방면으로 퇴각하는 일본군을 쫓아 다락바우현(충주 가금면 누암리) 지나 안반천(安盤川)까지 추격하였다. 그리고 충주로 회군하는 길에 수안보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을 직접 공격하였다. 이 공격에서 깃발을 흔들고 손수 총을 쏘면서 반나절 동안 치열한 전투를 지휘하였다. 하지만 같은 해 (음)1월 13일(2월 25일)전투과정에서 일본군의 유탄에 맞아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심철기⋮
국어사전
원문에서 어려운 낱말을 선택하거나 직접 검색해 보세요.
낱말을 검색하면 뜻풀이가 여기에 표시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