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弼相
弼相1887 ~ 1909. 1. 7
관련 단체
- · 동우회(同友會)
포상 정보
- · 독립장(2003)
관련 사건
- · 후기의병(진도)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독립장(2003) 기록에 따르면 1909년 당시 23세로, 1887년생으로 추정된다. 자세한 출신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1905년 일제가 을사늑약을 맺고 외교권을 박탈하였다. 1907년 광무황제(고종)의 헤이그특사 파견을 빌미로 을 강제퇴위시키려고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1907년 6월 황실존중·청년교육·동양평화를 표방하고 서울에서 조직된 동우회(同友會)는 7월 18일 고종의 퇴위와 일본행 및 새로운 조약의 체결을 저지하기 위한 회의를 개최하였다. 그 결과 그와 같은 주장을 강요하는 대신의 주살(誅殺)을 고종에 상소하는 한편, 일반 민중과 연대하여 이를 반대하는 저지투쟁을 전개하기로 하였다. 7월 19일부터 시위를 전개하였고, 20일 석고단(石鼓壇)에 모인 2만 여의 민중은 일진회(一進會) 기관지 국민신보사(國民新報社)를 습격하고 이를 주도한 이완용의 집을 불태웠다. 이로 인해 동우회의 회장(會長) 윤이병(尹履炳), 부회장(副會長) 김재붕(金在鵬)을 비롯한 간부진 및 회원과 이에 참여한 일반대중 여러 명이 체포되었다. 이 과정에서 강준영(姜俊永)·최원석(崔元錫) 등과 함께 일반 민중으로 각처에서 과격한 연설을 하는 등 적극 가담한 이유로 붙잡혔다. 1907년 12월 29일 평리원(平理院)에서 유(流)형 10년을 받고 1908년 1월에 진도(珍島)로 유배되었다. 한편, 이 무렵 호남지역은 군대해산 조치 이후 의병운동이 확대되어 1908년 봄부터 하반기까지 극성기를 이루며 최대 격전지가 되었다. 그에 따라 호남지역에서 의병의 활동범위는 남부 해안지역까지 확대되었다. 전라도 해안 및 도서지역의 의병투쟁은 주로 심남일 의병부대 및 그 휘하의 인물들에 의해 주도되었고, 특히 1908년 후반 심남일의 의병부대는 활동범위를 해남까지 확대하였다. 1909년 1월 일제 측의 보고에는 이러한 상황에 대해 “전남 해남(海南)·무안(務安) 연안 및 완도(莞島)·진도에서의 폭도는 근래 점차 창궐(猖獗)을 극하기에 이르렀다.”라고 기록하였다. 이렇듯 전라남도에서의 의병운동이 해남 및 인근 도서지역까지 확대되면서, 이 지역에 정배된 유배수들이 유배지를 이탈하여 의병에 투신하는 경우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완도에 유배된 황준성(黃俊聖)·추기엽(秋珙燁)·정철화(鄭哲和) 등이 유배지를 탈출하여 심남일이 주도하는 의병부대에 가담하거나 소규모 부대를 만들어 해남일대에서 활동하였다. 이처럼 도서지역까지 의병운동이 확대되어 가는 상황에서 11월경 진도의 유배지에서 탈출하여 해남군의 우수영(右水營) 지방을 돌며 항일의식을 고취하며 해남일대에서 활동하는 의병부대에 합류하였다. 1909년 1월 3일 의병부대의 일원으로 진도를 공격하고 해남 방면으로 퇴각하였다. 그러나 다음날인 4일에 우수영 인근에서 목포경찰서 일제 순사 토벌대의 이치지마[市島] 경부(警部)에게 소재지가 탐지되어 붙잡혔다. 그리고 1월 7일 목포경찰서로 호송 도중 오후 7시 무렵 해남 개초리(開初里) 부근 약(約) 육정(六町) 지점의 산중(山中)에서 야음을 틈타 탈출을 시도하다가 집중사격을 받고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원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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