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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鉉周

鉉周

1879. 9. 15 ~ 1930. 2.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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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李鉉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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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광주(光州)의병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전라남도 광주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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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단체

  • · 김태원(김준) 의병부대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후기의병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1879년 9월 15일 전라남도 광주군(光州郡) 하남면(河南面) 산정리(山亭里)에서 태어났다. 이명은 이운정(李運正)이다. 1907년부터 1909년까지 김태원(金泰元), 김준(金準) 의병부대에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1905년 일제에 의해 강제로 을사늑약이 체결되어 외교권이 박탈되는 등 국권을 상실할 위기 속에 다양한 항일 단체들이 결성되어 이에 대응하였다. 1906년 영광에서는 기삼연(奇參衍)과 김용구(金容球)를 비롯한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의 문인들 중심으로 일심계(一心契)가 조직되어 국권회복을 도모할 동지들을 규합하였다. 1907년 광무황제(고종)가 강제로 퇴위되고 대한제국 군대까지 강제로 해산 당하는 등 국권상실이 현실화되자, 전국에서 다시 의병이 일어나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였다. 당시 전남에서는 의병장 기삼연을 비롯해 김태원·김율(金聿) 형제 등이 의병부대를 일으키고 활발하게 항일투쟁을 펼치고 있었다. 1906년 김태원·김율 형제가 거의하고 의병을 규합하자 이에 호응하고 참여하였다. 한편 기삼연은 기정진의 재종질이자 명문가 출신으로 1896년 기우만(奇宇萬)이 주도했던 장성 의병에도 참여해 활동하였다. 기삼연은 1906년 봄부터 영광의 김용구를 만나 거의를 계획했으며, 동지들을 모으기 위해 일심계를 조직하여 결집 기반으로 삼았다. 기삼연은 여러 차례 거의를 통해 주변 의병들을 규합하였으며, 1907년 10월 30일 영광의 김용구, 나주의 김태원·김율, 장성의 이철형(李哲衡), 함평의 이남규(李南奎) 등과 함께 호남창의회맹소(湖南倡義會盟所)를 정식으로 결성하였다. 그리고 맹주로 기삼연이 추대되었고, 도통령에 김용구, 선봉장에 김태원, 중군장에 이철형, 후군장에 이남규 등이 임명되어 의병부대를 이끌었다. 이때 김준이 이끄는 선봉에 소속되어 활동하였다. 호남창의회맹소는 이후 조직을 정비하고 인근 지역에서 의병을 모집하고, 군기와 군량을 준비해 군사훈련 등을 실시하였다. 위정척사적 성향이 매우 강했던 호남창의회맹소는 1908년 1월 말까지 항일투쟁을 치열하게 전개해 나갔고, 곡식의 역외유출 금지를 통해서 지역 주민들의 생존권을 지키고자 하였으며, 방곡과 납세거부투쟁 등을 이끌기도 하였다. 그러면서 주로 장성·영광·담양·고창·함평, 무장 등의 지역에 있던 순사주재소와 우편취급소, 거류 일본인들을 공격하였다. 특히 1907년 10월 29일에는 고창성을 공격해 점령하였으며, 12월 7일에는 법성포 순사주재소를 습격해 무기를 노획하고 그곳의 사창을 점령해 저장되어 있던 곡식을 군량미로 징발하였다. 한편 1907년 12월 중순경 기삼연과 선봉장 김태원은 호남창의회맹소를 분진키로 결정하고, 각각 장성·순창 지역과 영광·나주·함평·무안 지역으로 나누어 독자적으로 활동하면서 의병부대를 강화하기로 하였다. 김태원 의병부대에 들어간 이후 소규모 단위로 산악지대를 돌아다니며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일제는 이에 맞서 대대적인 진압 작전을 펼치며 함평 연안지역으로 의병을 압박하는 포위작전을 전개하였다. 결국 기삼연은 1908년 2월 2일 순창에서 일본군 토벌대의 기습을 받고 붙잡혔으며, 이 소식을 접한 김태원은 날랜 병사 30여 명을 이끌고 기삼연을 탈환하고자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후 기삼연이 재판 없이 총살되자, 다시 김용구와 김태원 등 몇몇 지도부를 중심으로 의병부대를 재편하고 일본군과 유격전 등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특히 김태원의 지휘 하에 동료들과 함께 유격전이나 기습 등을 수행하는 무장투쟁을 이어나갔다. 일제는 유격전술에 능한 이들을 “동작이 기민하여 신출귀몰, 군대와 경찰의 두통거리”라고 평가할 정도였다. 일제의 침략기구·징세기관에 대한 공격과 친일세력 처단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이들과 함께 광주를 중심으로 인근에서 일제 수비대·헌병대 등과 치열하게 전투를 벌였다. 특히 무등산 뒤편 무동촌(현 담양군 남면 무동리)에서는 일제의 광주수비대장인 요시다(吉田勝三郞) 소좌를 처단하기도 하였다. 요시다는 ‘의병 잡는 귀신’으로 소문나 있었으며,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당시 많은 전공을 세운 인물이었지만, 습격해 온다는 소식을 들은 김태원은 매복하는 방법으로 공격하였기에 가능하였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총상을 입은 후 귀가하였고, 강길환·조덕관 등은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홍동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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