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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黃龍

黃龍

1886 ~ 1910. 5.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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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李黃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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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순창(淳昌)의병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전라북도 순창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지도에서 보기 →

관련 단체

  • · 양윤숙 의병부대
  • · 최산흥 의병부대

포상 정보

  • · 독립장(1990)

관련 사건

  • · 후기의병(양윤숙 의병부대
  • · 최산흥 의병부대)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독립장(1990) 전라북도 순창군(淳昌郡) 호계면(虎溪面, 현 인계면) 마암리 출신이다. 판결문에 따르면 1886년생으로 추정된다. 이후 순창 무림면(茂林面) 장암리(長岩里, 현 구림면 월정리 장암)에 거주하였다. 1910년 당시 24세로, 의병에 참여하기 전에는 소금과 누룩의 소매상에 종사하였다. 이명으로 이공영(李公榮)으로 불렸다. 1907년 일제는 헤이그 특사 파견을 빌미로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고 뒤이어 한일신협약(정미7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였다. 그리고 그 부수 각서의 비밀 조치에 근거하여 대한제국 군대의 해산을 추진하였다. 이를 계기로 해산 군인이 의병운동에 가담함으로써 전국적으로 의병투쟁이 한층 거세기 일어기 시작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08년 8월부터 양윤숙(楊允淑) 의병장과 그 휘하에서 활동한 중군장(中軍將) 최산흥(崔山興)이 이끄는 부대에서 참여하여 활약하였다. 양윤숙은 1908년 (음)7월 2일에 거의 목적과 명분을 밝힌 의격문(義檄文)을 전남 각 군에 돌려 의병을 소모하고 부대의 조직을 편제하였다. 그리고 도총독(都總督)이 되어 전북 순창 구암면(龜岩面) 국화촌(菊花村) 회문산(回文山)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이후 1908년 (음)8월·(음)9월 휘하의 향관(餉官) 서기협(徐基俠), 중군장 최선홍 등에게 부대를 나누어 주어 순창 무림면(茂林面) 화암리(花岩里) 등지에서 순창수비대(淳昌守備隊), 남원수비대(南原守備隊)의 일제 헌병과 순사들을 기습하여 교전을 벌였다. 양윤숙 부대는 당시 일제 군경의 의병부대 진압을 위한 감시와 탄압에 대응하여 이처럼 휘하의 지휘관에게 소규모로 부대를 분산시켜 운영하며 일제의 추적을 피하였던 것 같다. 양윤숙 의병부대 휘하의 중군장 최산흥은 그 가운데 가장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최산홍은 이미 1906년 10월부터 태인과 부안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이경춘(李慶春) 의병부대의 도십장(都什將)·전포장(前砲將)을 맡은 바 있고, 1907년 11월부터는 이석용(李錫庸) 의병부대의 검찰(檢察)로 이듬해 4월까지 임실·남원·진안·용담 등지에서 적극적인 의병 항쟁을 전개한 인물이다. 그러다가 1908년 6월부터 양윤숙 의병장 아래에서 활약하였다. 최산흥이 양윤숙 의병장의 휘하에서 활동하던 시기 최산흥 의병부대에 가담하여 친일파 처단, 군자금 모금 등의 여러 활동을 하였다. 9월 8일((음)8월 13일)에 양인숙 및 그 부하 약 80~90명과 함께 동도 임실 덕치면(德峙面) 암리(岩里)의 임실과 순창의 경계인 갈치에서 자신들을 붙잡으려고 했던 순창순사주재소의 한인 순사 박경홍(朴敬弘)을 장석봉(張石奉)과 함께 직접 처단하였다. 1908년 11월 초순에 양윤숙 의병장의 지시로 검찰 직무를 맡은 최명칠(崔明七)에게 명하여 의병 34명을 이끌고 순창 군서기 조명운(曺明云)으로부터 10일경에 200냥, 15일경에 엽전 300냥 등 모두 500냥의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그리고 11월 22일에는 동료 의병 50~60명과 함께 기병대에게 집을 빌려준 전북 임실 강진면(江津面) 갈담리(葛潭里)의 변대규(邊大奎)의 가택 외에 2동(棟)을 불태웠다. 위와 같은 양윤숙 및 최산흥 휘하에서 여러 활동은 박경홍을 처단한 사건 외에 직접 참여했다는 명확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재판기록에 따르면 양윤숙과 최산흥 의병부대에 8월에 가담한 이후 순창군에서 이들의 행위를 조력했거나, 특히 최산흥에 대한 신문조서 등이 교수형을 받는 중요한 증거로 인정되고 있는 점은 이러한 의병활동에 참여했음을 분명히 뒷받침해 준다. 이렇듯, 순창과 임실 일대에서 여러 활동을 이어 가던 가운데 1909년 가을부터 시작된 일본군의 이른바 남한대토벌작전으로 많은 의병들이 자수·체포·순국하는 상황에서 붙잡혀서, 1910년 1월 12일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에서 이른바 폭동 고살(故殺)의 죄명으로 교수형을 받았다. 이에 3월 3일 대구공소원에 항소했으나 기각되고, 4월 14일 열린 고등법원의 상고심에서도 기각되어 형이 확정되었다. 그리고 5월 30일 대구감옥에서 양진여(梁振汝) 의병장과 함께 형이 집행되어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원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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