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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룡

金基龍

1869 ~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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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김기룡

김판서는 역사 탐구를 돕는 가상의 AI 문화해설사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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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북 종성(鐘城)만주방면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함경북도 종성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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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단체

  • · 대한군정서

포상 정보

  • · 애족장(2013)

관련 사건

  • · 대한군정서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2013) 1869년 함경북도 종성군(鐘城郡) 남산면(南山面) 세천리(細川里)에서 태어났으며, 사망 연월일은 미상이다. 이명은 도심(道深)이다. 어려서 한문을 수학하였고, 19세 때부터 22세 때까지 한의학을 공부하였다. 그 후 포목과 북어 행상으로 전국을 배회하던 중 사업에 실패하고, 48세 때 포항과 만주 방면에서 농업에 종사하였다. 1920년 (음)1월 중순 중국 헤이룽장성(黑龍江省) 하얼빈(哈爾濱)에서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에 가입하여 사령관 김좌진(金佐鎭)의 참모로 임명되었다. 1922년 북로군정서 국내 특파원으로 임명되어 (음)3월 서울로 잠입하였다. 그의 임무는 군자금 모집과 사관학교 설립을 위한 자산가 규합에 있었다. 같은 해 9월까지 경성부 권농동(勸農洞) 김윤제(金允濟)의 집에 방 한 칸을 얻어 은신하며 동지 박동지(朴東芝, 이명 朴夏鎭)와 함께 연락하면서 자산가를 물색하였다. 두 사람은 모두 한의사로 가장하여 활동하였다. 그리하여 서울 중림동의 윤치성(尹致晠)에게 김좌진의 내명(內命)을 전달하고 교섭하였으나 거절당하는 등 군자금 모집에 어려움을 겪었다. 이러한 상황을 보고하기 위해 같은 해 9월 총군부로 귀환하였다. 북로군정서로 돌아가 김좌진으로부터 독립공채 100원권 17매, 50원권 36매 총액 3,500원을 수령하여 1923년 3월 10일경 다시 서울로 잠입하였다. 그리하여 서정두와 조해룡을 동지로 규합하고 군자금 모집 착수 계획을 추진하던 중 1924년 3월 12일 관철동에서 동대문경찰서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일제는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발행하는 독립공채권을 군자금 모집에 이용하려고 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내사를 강화하였다. 그러던 중 1924년 3월 12일 오후 1시경에 서울 관철동 조익준 집에 있다가 잠복하던 경찰에 붙잡혀 3월 24일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에 송치되었다. 1924년 4월 2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 위반으로 징역 3년 형을 선고받고 항소하였으나 1925년 5월 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2013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박성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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