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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正淳

正淳

1917. 8. 11 ~ 1941. 1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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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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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북 강계(江界)중국방면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평안북도 강계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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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애국장(1993)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1993) 1917년 8월 11일 평안북도 강계군(江界郡)에서 태어났다. 이명으로 왕현순(王現淳·王賢淳)·왕현복(王賢復)·이창선(李昌善)·이현순(李賢淳)·대현순(大賢淳)·대천덕(戴天德)·왕작림(王作林)·한대성(韓大成) 등을 사용하였다. 의열단(義烈團)의 중견간부 이영준(李英俊)이 친형이다. 1933년 고향인 강계를 떠나 중국 난징(南京)으로 갔다. 1933년 9월 16일 의열단이 운영하는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朝鮮革命軍事政治幹部學校)에 2기생으로 입교하였다. 교관으로 근무하고 있던 형 이영준의 영향이 컸을 것으로 짐작된다. 동료 대원은 “달리기 훈련에서 뒤떨어진 적이 없고 야외 훈련을 결석한 적이 없었으며, 강당에서 교육받았을 때 잠을 잔 적이 없었다. 야간경비 근무 중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낮잠 시간에 책을 읽고, 밤에 불이 꺼진 후에도 몰래 책을 읽었기에, 구대장(區隊長)은 그를 ‘밤쥐’라고 불렀다”고 훈련생활을 회고하였다. 1934년 4월 20일 졸업하였다. 같은 해 6월 말 2기생들과 함께 난징 시내 부자묘(夫子廟)에 있는 적선사(積善寺)라는 사찰로 이동하여, ‘의열단군관학교(義烈團軍官學校) 남경분교(南京分校) 학원연구반(學員硏究班)’이라는 명칭으로 수용되었다. 이후 중산대학(中山大學)에 진학하였다가 다시 민족혁명당으로 복귀하였다. 1937년 7월 7일 중일전쟁이 일어난 후 김학철(金學鐵) 등을 포함한 일대(一隊) 대원과 함께 중국중앙군관학교 성자분교(星子分校) 특별훈련반에 들어가 군사훈련을 받았다. 1938년 8월 5일 졸업 후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 제1구대원으로 편성되어 중국군 제9전구에 배치되었다. 후베이성(湖北省) 따사핑(大沙坪)·통성(通城)·시산(錫山)·바이니(白霓) 등지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전단 유포, 도로 파괴, 지뢰 매설, 전주와 전기선 절단, 부상한 동지 구호 등의 과업을 수행하였다. 1940년 남악(南嶽) 서남지역에 있는 유격훈련반에 파견되어 간부 양성 교육을 받았다. 졸업 후에는 조선의용대 화북지대(朝鮮義勇隊華北支隊) 대원으로 화북지역에서 활동하였다. 1941년 11월 중순 대장 김세광(金世光)의 지휘 아래 조선의용대 화북지대 제2대 대원 20여 명과 함께 선전물 준비, 지방정세 조사 및 자체 정신동원공작 등의 준비를 마치고 항일전선으로 향하였다. 동욕을 떠나 이틀간 주야로 강행군하여 200km 떨어진 일본군과의 접경 지점인 허베이성(河北省) 원씨현(元氏縣)에 도착하였다. 12월 초순 이래 이들은 원씨현 일원에서 주민들과 좌담회 및 군중 집회를 여러 차례 개최하는 한편, 일본군이 주군하고 있는 석보루(石堡壘) 200m 앞까지 접근하여 큰소리로 외치는 선전 활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 12월 12일 새벽 일본군 300여 명이 제2대 대원들이 숙영하고 있는 호가장(胡家庄) 마을을 포위하고 공격해 왔다. 이날은 원씨현에서의 활동을 마감하는 ‘서안사변(西安事變) 기념’ 민중대회를 개최키로 한 날이었다. 불의의 기습을 당한 대원들은 군장을 꾸릴 틈도 없이 응전에 나섰다. 대원들은 서쪽 및 남쪽 고지를 점령하여 공격의 우위를 확보하려 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의 맹렬한 사격에 여의치 않았다. 일본군에 포위당한 대원들은 기관총과 소총으로 대응 사격하면서 포위망을 돌파하기 위해 분전하였다. 그리하여 대부분의 대원들은 탈출에 성공하였으나, 손일봉(孫一峰)·최철호(崔鐵鎬)·박철동(朴喆東) 등과 함께 전사하였다. 김학철은 중상을 입고 일본군에 붙잡혔다. 대장 김세광, 분대장 조열광, 대원 장례신도 부상을 입었다. 전투는 팔로군의 지원으로 끝났고, 일제의 공격은 호가장 마을에 침투해 있던 중국인 첩자의 밀고 때문으로 밝혀졌다. 1942년 2월 26일 충칭(重慶)에서는 전사 대원들을 위한 추도회가 열렸다. 량한차오(梁寒操) 중국군사위원회 총정치부 부부장의 치사, 김약산(金若山) 조선의용대 대장의 순직 경과보고, 리요우팡(李友邦) 대만의용대(臺灣義勇隊) 대장과 ‘일본문제전문가’ 왕펑성(王芃生) 등의 강연 순서로 진행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들에 대한 ‘추모특집’ 호로 충칭에서 발행된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 제42호에서는 위의 전투를 ‘싱타이전투(邢台戰鬪)’로 불렀고, 전투 및 전사 일자를 12월 26일로 표기하였다. 또 같은 책에서는 전사 대원들의 신상·약력 및 활동 상황을 자세히 소개 추도하였고, 허잉친(賀應欽) 중국군사위원회 총참모장, 우톄청(吳鐵城) 중국민당 중앙당 비서장 등 중국 국민정부 인사들과 중국공산당 중경판사처(重慶辦事處) 대표 ‘저우언라이(周恩來)·동비우(董必武)·덩잉차오(鄧穎超)’ 명의의 만련(輓聯) 등을 게재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3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한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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