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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化翼

化翼

1900. 9. 5 ~ 1978. 3.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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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李化翼

김판서는 역사 탐구를 돕는 가상의 AI 문화해설사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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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 장연(長淵)중국방면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황해도 장연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지도에서 보기 →

관련 단체

  • · 유호한인청년회
  • · 상해 청년동맹회
  • · 의열단

포상 정보

  • · 독립장(1963)

관련 사건

  • · 장덕진 의거
  • · 나석주 의거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독립장(1963) 1900년 9월 5일 황해도 장연군(長淵郡) 낙도면(樂道面) 석장리(石長里)에서 이치원(李致元)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광주(廣州)이고, 이명은 이승춘(李承春)이다. 해주농업학교(海州農業學校)를 졸업하고, 1920년 12월 고향에서 최창한(崔昌翰)·이기춘(李起春) 등과 독립단을 조직하여 군자금 모집에 나섰다. 1921년 1월부터 3월 사이에 동지들과 함께 권총을 소지하고 장연군 목감면(牧甘面)의 곽수(郭琇), 목감면 나당리(羅堂里)의 손승훈(孫承薰), 순택면(蓴澤面) 종현리(鐘峴里)의 이윤철(李潤哲), 순택면 비석포리(碑石浦里)의 이응엽(李應燁)을 차례로 찾아가 군자금 출연을 요청하였다. 손승훈 등이 소액만을 내놓거나 불응하여 성과가 거의 없자, 손승훈과 이응엽의 집을 불태워버렸다. 4월 9일 순택면 학현리(鶴峴里) 김병순(金炳淳)의 집으로 가서 군자금을 거두려 하였으나 불응할 뿐 아니라 일제 경찰에 밀고까지 당하였다. 스즈키 사요시(鈴木佐吉) 등 장연경찰서원들에게 붙잡힐 뻔했는데 총을 쏘아 대응하며 피신하였다. 이로 인해 그동안의 군자금 모집 활동 행적이 드러나 일제 경찰의 추적을 받게 되자 이영선(李永善)과 함께 중국 옌타이(煙臺)로 갔다가 상하이(上海)로 향하였다. 그 도정(道程)에 재령(載寧) 출신의 나석주(羅錫疇)를 만나 손가락의 피로 결의형제를 맺어서 막역한 사이의 동지가 되었다. 1922년 6월 상하이에서 윤자영(尹滋英)·나석주 등 청년지사 15인과 함께 유호한인청년회(留滬韓人靑年會) 결성을 발기하고 인성학교(仁成學校)에서 발회식을 개최하였다. 1924년 초에 의열단(義烈團)에 가입하였고, 그해 3월 창립된 청년동맹회(靑年同盟會)에도 가입하여 진성회원이 되었다. 1924년 8월 18일 밤, 임시정부의 재정 궁핍 상황을 타개하고자 장덕진(張德震)·김문희(金文凞, 이명 金海山)와 함께 각자 권총을 들고 프랑스조계 길안리(吉安里)의 중국인 도박장을 습격하였다. 거액의 판돈을 거두어 나가려고 할 때 그곳에 상주한 프랑스 경찰과 중국인 탐정이 쏜 총에 장덕진이 목을 관통당하여 절명하였다. 김문희와 함께 현장에서 붙잡혔으나 1년 후인 1925년 7월 13일 무죄로 풀려났다. 이 사건은 밀정 김명현(金明鉉)이 일본총영사관 나카가와 마스모토(中川松本) 경부(警部)의 지령대로 장덕진의 모험적 행동을 충동질하고 조계 공부국(工部局)에 밀고하여 일어났다. 1926년 5월경 톈진(天津)에서 나석주와 함께 김창숙(金昌淑)을 만나 국내 일제 기관 습격 및 친일파 처단 거사에 나설 것을 제의받고 응낙하였다. 두 사람을 애제자처럼 여기는 김구(金九)가 특별히 추천하여 김창숙이 찾아온 것이었다. 7월에 의열단 간부 유자명(柳子明)·한봉근(韓鳳根) 및 김창숙과 톈진에서 5자 회동하여 행동 계획을 의논하고, 4인 모두 입국하여 거사에 나서기로 합의하였다. 그런데 안전한 입국 방법을 찾다 보니 몇 달이 지나버렸고 최소한의 자금 조달도 막막하였다. 이에 12월 중순 톈진의 프랑스조계 내 공원에서 나석주와 만나 1차로 나석주가 경제적 착취기관 응징의 뜻으로 동양척식회사 경성지점과 식산은행을 폭파하면 이승춘이 웨이하이웨이(威海衛)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국내로 들어가 조선총독부 공격 혹은 총독 폭살 거사를 감행키로 결의하였다. 그리하여 인천을 거쳐 단신 밀입국한 나석주가 12월 28일 투탄·총격 의거를 결행하고 자결하였다. 이때부터 가동된 촘촘한 경계선과 수사망 때문에 2차 거사의 기회를 잡기가 도무지 어려웠다. 이에 베이징(北京)으로 돌아가 일단 은신 중이던 1927년 4월 23일, 김천우(金天友, 본명 金弘善)의 밀고로 일본총영사관 통역관 기토 고츠기(木藤克己)와 경찰서원에게 불법 체포되었다. 5월 30일 신의주(新義州)로 압송되어 일제 경찰의 취조를 받고 6월 17일 검사국으로 송치되었다. 이례적으로 장연·신천(信川)·해주(海州) 등 각 경찰서로 끌려다니며 중국으로 건너가기 전의 과거 행적을 낱낱이 조사받고 서울로도 압송되어 나석주의거 관련 혐의에 대해 조사 받았다. 1928년 3월 예심 종결과 더불어 이른바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 강도미수죄, 방화죄, 폭발물취체규칙 위반, 살인 및 살인미수죄로 기소되어 재판받고 1928년 6월 27일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징역 15년 형을 받았다. 그 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겪다 일부 감형되어 13년 만인 1941년에 풀려났다. 광복 후 1952년 정부 감찰위원회 감찰국장과 1970년 제2대 광복회장을 지냈다. 1978년 3월 2일 사망하여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김영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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