林鳳淳
鳳淳1916. 5. 20 ~ 1950. 8. 16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의열단
- · 민족혁명당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남경군관학교사건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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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0) 1916년 5월 20일 평안남도 강동군(江東郡) 만달면(晩達面) 운학리(雲鶴里)에 본적을 둔 임정근(林貞根)의 아들로 평양부(平壤府) 신창리(新倉里)에서 태어났다. 이명은 송광(宋光)·임성일(林成一)이다. 1923년 평양의 상수(上需)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여 다니다 1928년 5월 서울의 재동(齋洞)공립보통학교로 전학하여 1929년 3월 졸업하였다. 1930년 8월 평양전흥주식회사에 견습 전공(電工)으로 취직해 일하다가 1934년 7월 사직하였다. 1934년 9월 중순 진남포(鎭南浦)에서 배를 타고 중국으로 건너가 톈진(天津)과 베이징(北京)에서 2개월씩 체재한 다음, 1935년 1월 난징(南京)으로 가서 의열단(義烈團) 간부학교 교관을 지낸 오균(吳鈞)을 만나 그 집에 2개월 동안 기숙하였다. 머무는 동안 간부학교 입학지망생인 동숙자 3명과 함께 일요일마다 간담회를 갖고 세계정세와 조국독립의 전망을 논하고 항일운동 투신의 의지를 다졌다. 또한 3월 1일에는 난징 모처의 의열단 아지트에서 열린 3·1운동 기념식에 참석하여 김원봉(金元鳳)과 윤세주(尹世胄)의 연설을 들었다. 1935년 4월 1일 의열단이 장쑤성(江蘇省) 장링현(江寧縣)의 천녕사(天寧寺)에 교사(校舍)를 확보하여 개설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朝鮮革命軍事政治幹部學校) 제3기 과정에 입학하여, 항일독립투사로 거듭남에 필요한 소양 교육을 6개월간 받았다. 재학 중인 6월 하순에 교관 김세일(金世日)의 권유로 의열단에 가입하였다. 7월 15일경에는 역시 김세일의 권유대로 민족혁명당(民族革命黨)에도 가입하였다. 동년 9월 30일 졸업하고, 난징 시내의 화로강(花露江) 묘오율원(妙悟律院)으로 옮겨가서 동기 졸업생 30여 명과 합숙하며 대기하였다. 경험 있음을 내세워 장차 의무(醫務) 요원으로 일하기로 약정도 하였다. 그런데 갑자기 얼굴 부위에 반흔해족종(瘢痕蟹足腫 ; 게 다리 모양의 자국들이 얼기설기 생기는 것)이 발병하였다. 난징에서는 치료 불능이라 하여 본국에서 치료받기 위해 1936년 2월 초순 귀국하였다. 그때 김원봉으로부터 “완치되면 난징으로 귀환하고, 속히 치료되지 않거든 국내에서 당원을 획득해 지도하라”는 지령을 받았다. 상하이(上海)와 칭따오(靑島)를 거쳐 귀국한 뒤 서울 종로 1가의 의형(義兄) 최석린(崔錫麟) 집에 머무르고 있으면서 동지 포섭 기회를 노리던 중, 밀입국 사실을 포착한 경기도경찰부에 1936년 8월 29일 붙잡히고 말았다. 일제 경찰의 엄혹한 취조와 검사국 예심을 거친 끝에 1936년 11월 30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을 받았다. 항소하였으나 12월 2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1938년 12월 22일 출옥하여 은거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김영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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