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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鎭榮

鎭榮

1890. 11. 1 ~ 1933. 9.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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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李鎭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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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안성(安城)3.1운동

지도 위치

시·군·구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기도 안성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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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안성 원곡면.양성면(4.1) 3.1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1890년 11월 1일 경기도 안성군(安城郡) 원곡면(元谷面) 칠곡리(七谷里)에서 태어났다. 이명은 이선호(李善浩)이다. 고향에서 농업에 종사하였다. 1919년 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확대되는 가운데 안성군 원곡면에서도 만세시위가 준비되었다. 같은 마을인 칠곡리의 이유석(李裕奭)·홍창섭(洪昌燮)·남현서(南玄西) 등으로부터 만세시위 계획을 전달받고 참여를 결의하였다. 4월 1일 저녁 이한영(李漢榮)·이병오(李丙五)·이유만(李裕萬)·이상근(李相根) 등 마을 주민 200여 명과 함께 면사무소로 향하였다. 면사무소 앞에는 원곡면의 각 마을에서 1,000여 명의 주민들이 집결하였다. 이들과 함께 큰 목소리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그럼에도 면사무소 직원들의 반응이 없자 면장 남길우(南吉祐)와 면사무소의 직원들을 밖으로 끌어내 이들에게 태극기를 쥐어주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게 하였다. 면장 남길우 등이 저항하지 못하고 순순히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치자, 만세시위의 분위기는 한껏 고조되었다. 이에 고무된 이유석·홍창섭 등은 경찰주재소·우편소 등 일제의 주요 시설이 위치한 양성(陽城)으로 가서 그 지역의 주민들과 함께 더욱 적극적인 만세시위를 전개하자고 제안하였다. “양성으로 가자”고 외치는 주장에 적극 호응하여 다른 주민들과 함께 시위대열을 형성하였다. 시위 대열의 선두에 면장 남길우를 앞세우고, 횃불을 올려 길을 밝히고 ‘독립만세’를 연창하며 양성으로 행진하였다. 만세시위대가 양성면과 접경을 이루는 성은고개에 도착하자, 이유석 등의 주도자들은 행진을 멈추고 집회를 개최하였다. 이유석·홍창섭 등이 차례로 주민들 앞으로 나와 “일제의 앞잡이인 면사무소, 주재소, 우편소 등을 모두 때려 부숴야 한다”, “양성 읍내에 있는 일본인도 모두 쫓아 버려야 한다”, “여러분은 돌 또는 몽둥이를 지참하여 활동하라”는 등의 내용으로 연설하였다. 일본 시설을 공격하자는 제안에 적극 호응하여 돌멩이와 몽둥이 등을 집어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양성면을 향해 행진하였다. 이날 밤 양성면에서도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오후 9시 경부터 수백 명의 양성면 주민들이 일제의 경찰주재소 앞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양성면의 만세시위가 끝나가던 즈음 원곡면의 시위대가 합류하자 서로 얼싸안고 기뻐하며, 더욱 힘차게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 모습을 보고 공감한 다른 주민들도 시간이 갈수록 만세시위에 동참함에 따라 시위대는 2,000여 명의 규모로 확대되었고, 만세시위의 분위기는 더욱 고조되었다. 시위대와 함께 ‘독립만세’를 연창하며 경찰주재소로 행진하여 경찰주재소 공격에 참여하였다. 주재소를 향해 돌을 던지고, 책상·의자 등의 기물을 한 곳에 모아 소각하였다. 이후 우편소를 습격하여 전신주를 넘어뜨려 소각하였다. 다음으로 일본인 토자토 토요테(外里與手)의 상점과 고리대금업자 다카 히데토모(隆秀知)의 집을 공격하였다. 주변에 민가가 많았기 때문에 건물을 불태우지 않고, 상점과 집 안의 물건들을 모두 밖으로 꺼내 소각시키며 다음날인 4월 2일 새벽까지 격렬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뒤늦게 만세시위 소식을 접한 일본군이 4월 3일 원곡·양성 지역으로 파견되었다. 일본군의 만세시위 참여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색출 과정에서 붙잡혀 안성경찰서로 연행되었다. 만세시위에 대한 무력 진압의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정치적 목적으로 만세시위를 이용하려는 일제에 의해 이른바 내란죄 혐의로 재판에 회부되었다. 정치적 목적의 기소였기 때문에 재판은 쉽사리 진행되지 못하였다. 1920년 3월 22일 고등법원은 “만세운동은 소요죄(騷擾罪)를 구성할 수는 있어도 내란죄를 구성할 수는 없다”라고 판결하고, 경성지방법원을 관할법원으로 지정하여 돌려보냈다. 그러나 1920년 8월 10일 경성지방법원이 “본건 공소를 수리하지 않음”을 선언함에 따라 실제 재판은 경성복심법원에서 진행되었다. 1921년 1월 2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 등으로 징역 3년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한성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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