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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洪烈

洪烈

1893. 10. 15 ~ 1922. 11.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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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李洪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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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안성(安城)3.1운동

지도 위치

시·군·구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기도 안성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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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1919년 안성군 원곡면
  • · 양성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1893년 10월 15일 경기도 안성군(安城郡) 원곡면(元谷面) 지문리(芝文里)에서 태어났다. 경관(敬寬)이라는 다른 이름도 있다. 고향에서 농업에 종사하였다. 4월 1일 이유석(李裕奭)·홍창섭(洪昌燮) 등 주도 인물들과 만세시위와 관련하여 연락을 주고받고 있던 같은 마을의 원성삼(元性三)에게 만세시위 계획을 전달받고, 강봉돌(姜奉乭) 등의 같은 마을 주민들과 적극적으로 만세시위에 참여할 것을 결의하여 면사무소로 향하였다. 약 1,000여 명의 주민들이 원곡면의 곳곳에서 원곡면사무소 앞에 집결하였다. 이들과 함께 이유석·홍창섭·최은식(崔殷植) 등의 지휘에 따라 면사무소 앞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만세시위 도중 이유석·홍창섭 등 주도자들은 면사무소에서 면장 남길우(南吉祐)와 면사무소의 직원들을 끌어내 그들에게 태극기를 쥐어주고 ‘대한독립만세’를 함께 외치게 하였다. 면장 남길우 등이 저항하지 못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자, 만세시위의 기세는 더욱 고조되었고, 이유석·홍창섭 등 주도자들은 이러한 만세시위의 기세를 몰아 만세시위의 확대를 계획하였다. 이들은 “양성으로 가자”고 외치며 과거 한 지역이었던 양성면의 주민들과 연합시위를 전개할 것을 제안하였다. 주도자들의 제안에 호응하여 주변의 주민들과 행진 대열을 갖추었다. 이유석 등의 지휘에 따라 횃불을 밝히고, 면장 남길우를 선두에 세워 ‘대한독립만세’를 연창하면서 양성면을 향해 행진하였다. 원곡면과 양성면의 경계를 이루는 성은고개의 정상에 시위대가 도착하자, 이유석 등의 주도자들은 일단 시위 행진을 멈추고, 만세시위의 분위기를 재정비하기 위해 집회를 열고 시위대를 격동시키는 내용으로 연설하였다. 이들의 연설을 듣고 주변에서 돌멩이와 몽둥이 등을 준비하여 ‘대한독립만세’를 연창하면서 주재소와 면사무소, 우편소 등이 위치한 양성면으로 행진하였다. 이날 양성면에서도 밤 9시 경부터 수백 명의 주민들이 모여 일제 경찰의 주재소 앞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양성면의 주민들은 해산하려던 즈음, 성은고개로부터 횃불을 밝히고, ‘대한독립만세’를 연창하며 양성면쪽으로 행진해 오고 있는 원곡면의 시위대를 목격했다. 두 지역의 주민들은 곧바로 합류하여 ‘대한독립만세’를 큰 목소리로 외치며 대대적인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원곡, 양성 두 지역 주민들의 연합으로 시위대의 규모는 2,000여 명의 대규모로 확대되었다. 이유석·최은식 등의 지휘에 따라 가장 먼저 일제 경찰의 주재소로 행진하여 주재소 앞에서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는 만세시위를 전개하면서, 주재소에 대한 공격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시위대의 선두에서 주재소를 향해 돌을 던져 주재소의 시설을 파괴하고, 기물에 불을 붙여 건물 전체를 소실시켰다. 이후 일제의 통신기관인 우편소를 공격하여 집기들을 다 들어내서 불태우고, 전신선을 끊고, 전신주를 넘어뜨렸다. 또 양성면 면사무소로 행진하여 기물을 모두 파괴하였다. 이후에는 양성면에서 거주하고 있던 일본인 잡화상 토자토 토요테(外里與手)의 상점과 고리대금업자 다카 히데토모(隆秀知)의 집을 습격하여 출입구를 부수고 가구, 물품 등을 태워버렸다. 다음 날인 4월 2일 새벽까지 양성면에서 격렬한 만세시위를 전개한 후, 원곡면으로 돌아와 원곡면사무소의 시설과 집기까지 파괴한 후 해산하였다. 일제는 4월 3일 조선주차군 제79연대 30여 명의 군대를 원곡면과 양성면으로 파견하여 4월 1일의 연합만세시위 참여자들에 대한 조사·색출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 과정에서 만세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사실이 인정되어 안성경찰서로 연행되었다. 이후 조선총독부의 고등법원 검사국에 의해 고등법원의 특별권한에 속하는 ‘내란죄’의 혐의로 재판에 회부되었다. 1920년 3월 22일 고등법원은 “만세운동은 소요죄를 구성할 수는 있어도 내란죄를 구성할 수는 없다”라고 판결하고, 경성지방법원을 관할법원으로 지정하여 돌려보냈다. 이에 대해 8월 10일 경성지방법원이 ‘본건 공소를 수리하지 않음’을 선언함에 따라 실제 재판은 만세시위로부터 거의 2년이 지난 1921년 1월 2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진행되었다. 이 재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과 소요죄, 방화죄로 징역 2년 6월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한성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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