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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喜錫

喜錫

1892. 6. 21 ~ 1950. 9.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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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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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함안(咸安)3.1운동

지도 위치

시·군·구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상남도 함안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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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애국장(1990)

관련 사건

  • · 함안군 함안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1990) 1892년 6월 21일 경상남도 함안군(咸安郡) 함안면(咸安面) 봉성동(鳳城洞)에서 태어났다. 이후 함안군 가야면(伽倻面) 검암리(儉岩里)에서 자랐다. 자(字)는 우범(禹範), 호(號)는 백천(白泉), 이명은 강상대(姜相大)이다. 서당에서 한학 교육을 받았으며, 1911년 상경하여 중동학교를 졸업하였다. 이후 다시 고향으로 내려와 함안군 여항면에 있던 동명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하였다. 1919년 3월 19일 함안군 함안면의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함안군 함안면 만세시위는 조한휘(趙漢輝)와 이찬영(李讚榮) 등의 지역 인사들이 서울에서 만세시위를 목격하고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온 것이 계기가 되었다. 서울에서 돌아온 지역 인사들은 함안에 돌아와서 만세시위를 계획하였는데, 이때부터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만세시위 거사일은 함안면 장날인 3월 19일로 결정하였고, 시위에 필요한 태극기 제작과 독립선언서 등사, 군중 동원을 위한 지역별 연락 등의 역할을 분담하였다. 이찬영·조한휘와 함께 서울에서 가져온 독립선언서의 등사를 담당하였고, 독립선언서가 내용이 길고 어려워서 군중이 이해하기 쉽게 고치고 내용도 짧게 줄여서 전단 형태로 만들었다. 만세시위 당일인 3월 19일 정오 이찬영과 함께 비봉산(飛鳳山)에서 고천제(告天祭)를 지냈다. 그리고 일제 경찰과 밀정의 감시를 피하기 위하여 함안면 내에 분산하여 있던 시위 군중에게 면 중심지인 봉성동(鳳城洞)으로 모이라는 신호를 하고 곧 하산하였다. 대형 태극기를 태평루(太平樓)에 걸고, 주위에 모인 수백 명의 군중에게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나눠주었다.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였다. 독립선언식을 마치고 시위 행진할 때 선두에서 군중을 지휘하며 경찰관주재소로 나아갔다. 시위대는 급격하게 불어나서 3,000여 명을 헤아렸고, 이에 놀란 일제 경찰들이 폭력적인 시위 진압에 나서자 군중도 적극적으로 대응하였다. 투석전을 전개하고 몽둥이 등을 들고 주재소, 군청, 우체국, 법원출장소 등 일제 관공서들에 진입하여 물리력을 행사하였다. 시위대의 기세가 꺾이지 않자 일제 경찰은 마산의 군대 병력 투입을 요청하였고, 중포병대대가 도착하여 총검을 휘두르며 진압에 나섰다. 군대의 총검 위협에 시위대는 해산할 수밖에 없었고, 일제 군경은 다음 날인 3월 20일까지 주도자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 작전에 나섰다. 시위 당일에는 체포를 모면했으나 결국 붙잡혔다. 1919년 12월 28일 부산지방법원 마산지청에서 이른바 소요죄와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년을 받았다. 형무소로 이감되는 도중에 탈주하는 데 성공하여 강상대(姜相大)라는 이름으로 지역 강습소에서 후학을 양성하였다. 1930년대에는 상경하여 신소년사(新少年社)의 주필을 맡기도 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83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배석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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