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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수만

印壽萬

1895. 5. 5 ~ 1945. 5.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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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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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수원(水原)3.1운동

지도 위치

시·군·구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기도 수원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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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애족장(1997)

관련 사건

  • · 1919년 화성군 장안‧우정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7) 1895년 5월 5일 경기도 수원군(水原郡) 장안면(長安面, 현 화성시 장안면) 석포리(石浦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당시 고향에서 농업에 종사하였으며, 이명은 한자가 다른 인수만(印水萬)이다. 1919년 4월 3일 화성군(華城郡) 장안·우정면(雨汀面) 연합 만세시위 참여하였다. 이 만세시위는 서울에서 전개된 만세운동에 참여하고 귀향한 천도교 순회전도사 백낙열(白樂烈)의 주도로 감리교계 천도교·개신교 인사들이 모여 계획되었다. 이들은 4월 3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구체적인 준비에 착수하였다. 각 마을 단위로 연락망을 구성하고, 태극기 등을 제작하였다. 4월 3일 오전 7시 시위 계획을 미리 전달받은 주민들은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이들은 대한독립 만세를 연창하면서 석포리로 행진하였다. 이날 뒤늦게 만세시위에 참여하게 되어서 수촌리(水村里)에서 시위대에 합류하였다. 시위대와 함께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백낙열의 주도로 시위대와 함께 장안면사무소로 행진하였는데, 이때 시위대의 규모는 1,500여 명에 달하였다. 시위대와 함께 장안면사무소의 집기와 창문 등을 파괴하고, 건물에 불을 질렀다. 이후 시위대는 우정면사무소와 화수리주재소를 향해 두 갈래 나뉘어 행진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화수리에 위치한 경찰주재소로 향하는 시위대에 앞장서 행진하였다. ‘독립만세’를 외치는 만세시위를 전개하면서 2,000여 명 규모의 시위대와 함께 돌을 던지며 공격하였다. 이에 일제 경찰의 순사부장 가와바타 타로(川端太郞)는 공포탄을 쏘며 시위대에 해산을 명령하였다. 그러나 다른 주민들과 함께 해산 명령을 무시하고 더욱 주재소에 대한 공격을 강화하였고, 가와바타는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적으로 총기를 발포하여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이에 시위대의 선두에서 가와바타 순사부장을 응징하기 위해 돌을 던지고, 구타하여 처단하였다. 이후 주재소 건물을 파괴하여 완전히 불태워 소실시킨 뒤, 해산하였다. 이 만세시위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4월 4일 장안면장 김현묵(金賢默)에 의해 일제 당국에 보고되었다. 일제는 다음 날인 4월 5일 조선주차군 79연대의 아리타 도시오(有田俊夫) 중위가 인솔하는 30여 명의 병력을 장안면과 우정면으로 파견하여 만세시위 참여자에 대한 조사·색출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 과정에서 수촌리를 시작으로 장안면과 우정면의 각 마을을 돌며 대부분의 가옥을 불태우고, 주민들을 고문 및 학살하는 지독한 보복과 만행을 자행하였다. 이때 일본군에게 붙잡혀 재판에 회부되었다. 내란죄 적용 문제를 두고 오랜 조사와 공판이 이어졌다. 1920년 3월 22일 고등법원에서는 내란죄를 적용하지 않기로 하고 경성지방법원으로 관할 재판소를 지정하였다. 같은 해 8월 10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변호사의 사법 절차 문제 지적의 법정투쟁의 결과 공소 불수리 처분을 받았다. 12월 9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과 소요죄, 살인죄, 방화죄 등을 이유로 징역 3년을 받아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7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한성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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