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林鳳洙

鳳洙

1887. 8. 23 ~ 1970. 7.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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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林鳳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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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괴산(槐山)3.1운동

지도 위치

시·군·구 대표 지점

이 위치는 충청북도 괴산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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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대통령표창(1992)

관련 사건

  • · 1919년 청주군 북일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대통령표창(1992) 1887년 8월 23일 충청북도 괴산군(槐山郡) 증평면(曾坪面) 증평리(曾坪里)에서 태어났다. 이후 청주군(淸州郡) 북일면(北一面) 세교리(細橋里)로 이주하고, 농업에 종사하였다. 1919년 4월 1일부터 2일까지 한봉수(韓鳳洙)·이태우(李太雨)와 함께 북일면 세교리 장터에서 전개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북일면 세교리 만세시위는 1907년 의병장으로 큰 활동을 펼쳤던 한봉수의 주도로 전개되었다. 한봉수는 3월 7일 청주 최초로 만세시위를 주도한 후, 세교리에서도 거사를 벌이기로 계획하였다. 1910년 국권상실 이후부터 일제 식민통치에 불만을 가지고 있다가 평소 존경하는 한봉수로부터 세교리에서의 만세시위 계획을 전해 듣고, 이태우와 함께 적극 동의하면서 동지로 결합하였다. 한봉수·이태우 등과 협의해 세교리의 장날인 4월 1일을 만세시위 거사일로 계획하였다. 4월 1일 오후 한봉수·이태우 등과 세교리 장터로 나가 주민들을 향해 나라의 독립을 위해 만세시위에 동참할 것을 호소하며 ‘독립만세’를 선창하였고, 이러한 취지에 공감한 사람들이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이어서 한봉수·이태우와 함께 시위대를 지휘해 ‘독립만세’를 외치며 장터 곳곳을 행진하는 만세시위를 밤까지 전개하였고, 일제 경찰들이 출동하지 않아 무사히 만세시위를 마치고 해산하였다. 다음날인 4월 2일 다시 만세시위를 전개하기 위해 한봉수·이태우와 세교리 장터에 모였다. 이때 나무심기 행사에 가기 위해 80여 명의 내수보통학교 학생들이 지도 교사인 엄익래(嚴翼來)·이건간(李建簡)과 더불어 장터를 지나가고 있었다. 한봉수와 함께 이들에게 만세시위의 취지를 역설하면서 참여할 것을 호소하였다. 이에 공감한 학생들과 장터에 있던 사람들까지 합세하면서 다시 만세시위가 시작되었고, 이들과 더불어 ‘독립만세’를 외치며 장터 인근을 행진하였다. 이 일로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1919년 5월 6일 공주지방법원 청주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태(笞) 90도(度)를 받아 고초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한성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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