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의재
任毅宰1882. 7. 7 ~ 1940. 10. 10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3)
관련 사건
- · 1919년 청양군 정산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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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3) 1882년 7월 7일 충청남도 청양군(靑陽郡) 정산면(定山面) 백곡리(白谷里)에서 태어났다. 이틀 동안 2차에 걸쳐 전개된 정산면 만세시위에서 제1차 만세시위에 해당하는 1919년 4월 5일의 정산시장 만세시위를 계획하고 주도하였다. 정산시장 만세시위는 백곡리 유림들을 중심으로 준비되었다. 서울에서 만세시위를 목격한 홍범섭(洪梵燮)은 정산에서도 만세시위를 일으킬 것을 결심하고, 독립선언서를 은밀하게 품속에 숨겨 갖고 귀향하였다. 4월 5일 아침 일찍 윤석희(尹錫禧)·박상종(朴商鍾)·홍세표(洪世杓)와 함께 홍범섭의 집에 모였다. “우리도 망국의 한을 풀게 되었다”고 이야기하는 홍범섭에게 서울 만세운동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들을 수 있었고, 그가 소지하고 온 독립선언서를 직접 읽고 그 정확한 내용을 알게 되었다. 이어 홍범섭의 만세시위 제안에 그 자리에서 동의하고 이날이 정산 장날이었기 때문에 다음으로 기약할 것 없이 바로 실행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는 동안 임창순(任昌淳)·임철재(任哲宰)·김필현(金弼鉉)·윤구학(尹龜學)·이건호(李建鎬)·이태호(李台鎬)·박춘서(朴春西)·윤기중(尹箕重)·윤봉학(尹鳳鶴)·이건직(李建直)·우달명(禹達明) 등이 도착하여 만세시위에 동의하고 준비에 합류하였다. 태극기를 제작하는 등 긴급하게 만세시위를 준비하여 다함께 서정리(西亭里) 정산시장으로 갔다. 오후 3시경부터 시장에 나온 사람들에게 태극기를 나눠주고, ‘독립만세’를 외쳤다. 만세시위를 시작하자마자 정산시장 북쪽에 대기하고 있던 정산헌병분견소(定山憲兵分遣所) 헌병들이 즉각 출동하였고, 이들에게 제압당해 시장 외곽으로 쫓겨났다. 그러나 만세시위를 포기하지 않고, 일제 헌병들에게 쉽게 제압당하지 않도록 서로 깍지를 끼고 대열을 정비하여 선두에서 시위대를 이끌고 정산시장으로 재진입하였다. 더욱 강렬하게 ‘독립만세’를 외치며 “한국은 이미 독립했으니 독립만세를 부르라”고 시장에 나온 주민들에게 호소하는 등 재차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에 곳곳에서 주민들이 호응하여 만세시위에 동참하였고, 이들과 시장 중심부를 행진하면서 ‘독립 만세’를 연창하였다. 정산시장 만세시위가 확대되어 가자, 다시 출동한 일제 헌병은 즉시 해산하라고 경고하면서 만세시위를 주도한 30여 명을 체포하였다. 이때 홍범섭·박상종·홍세표·윤석희 등과 함께 청양헌병분견소로 연행되었다. 이 과정에서 분노한 사람들이 만세시위에 참여하면서 시위대 규모는 오히려 700여 명으로 확대되었고, 연행자들을 대신하여 정산향교(定山鄕校) 직원(直員) 권흥규(權興圭)가 시위대를 지휘하였다. 시위대를 이끌고 헌병분견소로 달려가서 연행자 석방을 요구하며 격렬하게 시위하였는데, 당황한 일제 헌병의 발포로 권흥규가 현장에서 사망하였다. 이것은 2차 만세시위의 뇌관이 되었다. 다음날인 4월 6일 진행된 권흥규의 시신 운구는 그 행렬이 지나가는 정산면에서 목면 일대까지 1,000여 명이 넘는 주민들이 참여한 대규모 만세시위로 전개되었다. 일제 헌병대에 의해 붙잡혀 만세시위를 주도한 점이 확인되어 재판에 회부되었다. 1919년 5월 5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을 이유로 징역 1년 6월을 받았다. 판결에 불복하여 경성복심법원에 항소한 결과 6월 13일 징역 1년으로 감형되었으나, 불복하여 상고하였다. 최종적으로 7월 26일 고등법원에서 상고가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3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한성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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