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林一奉

一奉

1892. 10. 10 ~ 1922. 1.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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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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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안성(安城)3.1운동

지도 위치

시·군·구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기도 안성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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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건국포장(2015)

관련 사건

  • · 1919년 안성군 읍내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건국포장(2015) 1892년 10월 10일 경기도 안성군(安城郡) 읍내면(邑內面) 동리(東里, 현 경기도 안성시 안성1동)에서 태어났다. 담뱃대 직공으로 생계를 유지하였다. 1919년 3월 31일부터 4월 1일까지 경기도 안성군 읍내면 일대에서 전개된 만세시위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1919년 3월 11일 경기도 안성군에서는 양성면(陽城面) 동항리(東恒里)에 위치한 양성공립보통학교와 읍내면에 위치한 안성공립보통학교에서 학생들이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후 안성군의 만세시위는 3월 28일 원곡면(元谷面) 내가천리(內加川里)의 만세시위를 시작으로 읍내와 원곡면 일대로 확대되었다. 3월 28일 밤 서순옥(徐順玉)은 동네 사람 20여 명을 인솔해서 읍내면 동리에 위치한 산 위에 올라가서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를 시작으로 3월 29일 안성군 읍내면에서는 본격적으로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3월 29일 오후 8시 읍내면 장기리(場基里)에서 군중이 모여서 ‘조선독립만세’를 외쳤으며, 3월 30일 밤에는 안성군 안성시장에서 200~300여 명의 시위 군중이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면서 행진하였다. 이 과정에서 시위대는 400~500여 명으로 늘어났다. 그러자 시위대는 안성경찰서로 몰려가서 투석전을 전개하면서 ‘조선독립’을 외쳤다. 시위대는 읍내면사무소로 가서 미닫이 1개와 유리창 5장을 파괴하였으며, 안성군청 건물 앞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하다가 밤 11시 30분 무렵 해산하였다. 3월 31일과 4월 1일 지속된 안성시장 일대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3월 31일 낮부터 전개된 만세시위에 읍내면 주민의 일원으로 만세시위에도 참여하였다. 시위대 중에서 400여 명은 오후 1시 30분 무렵부터 2시까지 읍내면에 위치한 동산에 올라가서 ‘독립만세’를 외쳤으며, 주민들이 만세시위에 참여하도록 독려하였다. 이에 오후 5시 무렵 안성시장 일대에는 1,000여 명의 주민들이 집결하였으며 시위대는 3,000여 명으로 불어났다. 시위대 일부는 자동차 영업을 하던 이택승(李宅承)의 집으로 가서 일본군 수비병을 수송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날 밤 시위대 200여 명은 읍내면 동산에 올라가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4월 1일에 계속된 안성시장 만세시위에 다시 참여하였다. 4월 1일 밤 안성시장 일대에 500~1,000여 명이 모인 가운데 만세시위가 재개되었다. 그날 만세시위는 한국초(韓國初)·고성준(高成俊)·윤순철(尹順哲)이 사전에 준비하였다. 그들은 4월 1일 정오에 윤순철 집에 모여서 만세시위에 참여할 태극기 70여 장을 제작하였다. 그날 오후 8시 안성시장에 모인 군중에게 태극기를 나누어 주면서 만세시위를 이끌었다. 시위대의 일원으로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읍내면 일대를 행진하였다. 일제 군경에게 만세시위에 참여한 혐의로 체포되어 재판에 회부되었다. 1919년 5월 13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을 받았다. 이에 항소하였으나 1919년 7월 24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5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한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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