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林昌茂

昌茂

1893. 11. 6 ~ 1944. 5.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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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林昌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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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괴산(槐山)3.1운동

지도 위치

시·군·구 대표 지점

이 위치는 충청북도 괴산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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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만경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1893년 11월 6일 충청북도 괴산군(槐山郡) 증평읍(曾坪邑) 증평리(曾坪里)에서 태어났다. 전라북도 김제군(金堤郡) 만경면(萬頃面) 만경리(萬頃里)에 소재한 만경공립보통학교(萬頃公立普通學校)의 교사로 근무하면서 같은 학교 동료 교사들과 함께 1919년 4월 4일 김제군 만경면 만경장터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만경공립보통학교의 교사로 근무하면서 국권 상실 이후 평소에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교육을 하였다. 1919년 3월 1일 이래 전국적으로 만세운동이 확산되고 있다는 사실을 파악한 뒤, 만경에서도 만세운동을 일으킬 것을 결의하였다. 그 이전부터 일제 식민 통치에 대해 함께 불만을 토로했던 오연길(吳淵吉)·장태석·이석재(李錫在) 등의 동료 교사들과 익산군(益山郡) 오산면(五山面)에 거주하고 있던 문용기(文鏞祺)와 연락을 취하여 만세운동을 계획하였다. 이들과 협의하여 주민들이 많이 모이는 만경장터의 장날인 4월 4일을 거사일로 결정하고, 학생들과 함께 만세시위를 전개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거사일인 4월 4일 정오 경 오연길·장태석·이석재 등과 함께 만경공립보통학교의 3, 4학년 학생 전체 약 40명을 교정에 집합시켜 놓고, 연단에 올라가 학생들에게 독립의 당위성을 연설하였다. 연설 내용은 “경성에서는 학생들도 참여하여 조선독립만세를 외치고 있는데, 우리 만경에서는 아직 그러한 운동을 하지 않음은 면목이 없다. 마침 오늘은 만경의 장날이므로 너희들이 장터에 나가서 ‘조선독립만세’를 크게 외치면 장터에 모인 많은 사람들이 만세 소리를 듣고 따라 외칠 것이 틀림없으니, 이를 통해 조선의 독립을 꾀할 수 있을 것이다”라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연설에 거의 모든 학생들이 크게 공감하여 만세시위에 참여할 의사를 밝히자, 학생들을 독려하여 시위 대열을 형성하였다. 학생들로 조직된 시위대의 선두에서 태극기를 들고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며, 이들을 지휘하여 만경장터로 행진하였다. 장날을 맞은 만경장터에는 인근에서 나온 많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만경공립보통학교의 학생들로 구성된 시위대가 큰 목소리로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며 만경장터로 들어서자, 학생들의 만세시위에 공감한 수백 명의 주민들이 곧바로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하며 만세시위에 합류하였다. 이들을 지휘하여 만경장터의 곳곳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시위가 발생하자 만경주재소의 일제 경찰들이 출동하여 만세시위의 해산을 명령하였으나, 대규모 시위대의 위세로 해산 명령을 거부하고 만세시위를 지속하였다. 이에 일제 당국은 김제경찰서장 이하 8명의 순사들을 지원 병력으로 파견하여 무력으로 만세시위를 강제 해산시켰다. 이 과정에서 오연길·장태석·이석재 등과 함께 일제 경찰에 붙잡혀서 만세시위를 주도했다는 혐의로 재판에 회부되었다. 1919년 4월 16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2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항소하였으나, 같은 해 5월 14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 재차 상고하였지만, 그해 6월 14일 고등법원에서 최종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도면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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