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희도
任喜道1870. 11. 7 ~ 1924. 2. 14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대통령표창(2004)
관련 사건
- · 1919년 충남 청양군 정산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대통령표창(2004) 1870년 11월 7일 충청남도 청양군(靑陽郡) 정산면(定山面) 광생리(光生里)에서 태어났다. 농업에 종사하였으며, 1919년 4월 5~6일 청양군 정산면 서정리(西亭里) 정산시장과 다음날 목면(木面)으로 이어진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청양군에서는 1919년 4월 정산을 시작으로 목면까지 확대된 만세운동이 매우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이 만세시위는 백곡리(白谷里)의 유림 홍범섭(洪梵燮)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서울에서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귀향한 홍범섭은 임의재(任毅宰)·윤석희(尹錫禧)·홍세표(洪世杓)·박상종(朴商鍾) 등과 논의하고 만세시위를 계획하였다. 이들은 면사무소 소재지인 서정리 정산시장의 장날인 4월 5일을 만세시위 거사일로 결정하고, 태극기를 제작하는 등의 준비를 하였다. 4월 5일 오후 3시 경부터 홍범섭·임의재 등은 정산시장에서 주민들에게 태극기를 배포하며 만세시위를 시작하였다. 그러자 시장 인근에서 대기하고 있던 일제 헌병이 즉시 출동해 시위대의 해산을 명령하면서 주도 인물 30여 명을 정산헌병주재소로 연행하였다. 이때 시장에서 많은 주민들과 함께 이 장면을 보고 분노해 만세시위에 참여하고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후 정산향교(定山鄕校) 직원인 권흥규(權興圭)가 연행된 주도자들을 대신해 700여명 규모로 증가한 시위대를 이끌었다. 권흥규의 지휘에 따라 시위대와 함께 주재소로 쫓아가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홍범섭 등 연행자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격렬하게 만세시위를 전개하는 과정에서 권흥규가 일제 헌병의 총격에 맞고 현장에서 사망하였고, 다수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그러면서 시위대도 해산하였다. 4월 6일 아침 일찍부터 시신 운구를 위해 권흥규의 친인척과 전날 만세시위에 참여했던 사람들과 더불어 정산헌병주재소로 갔다. 오후에 주재소로부터 권흥규의 시신을 인수받고 시위대와 더불어 ‘배일사권공지구(排日士權公之柩)’라는 명정(銘旌)과 만장(輓丈) 등을 앞세우고 권흥규의 자택에 있는 목면 안심리(安心里)로 이동하였다. 운구행렬이 지나가는 길목마다 각 마을에서 노제를 올리고 통곡하며 곧바로 동참하였다. 오후 5시경 목면 지곡리(池谷里)를 경유할 즈음 사람들의 통곡은 ‘독립만세’의 외침으로 바뀌었고, 안심리로 향하는 내내 ‘독립만세’를 절규하면서 운구행렬에 동참하였다. 이러한 상황을 파악한 일제는 정산의 헌병파견대와 청양·공주(公州) 등 인근 지역의 헌병들을 목면 방향으로 급파하였다. 공주에서 출동한 일제 헌병들은 밤에 안심리에 도착한 운구행렬을 향해 무차별적으로 총격을 가하였다. 그 결과 권흥규의 조카딸 최윤안(崔胤安)과 상여꾼 김국삼(金國三)·유행길(柳行吉) 등이 사망하고, 다수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이후 운구행렬을 해산시키고 참여자 색출에 나선 일제 헌병에게 붙잡혀 청양헌병분견소로 연행되었다. 1919년 4월 22일 즉결심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태(笞) 90도(度)를 받고 고초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4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한성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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