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강환
張康煥1866. 3. 8 ~ 미상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2011)
관련 사건
- · 이천군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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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2011) 1866년 3월 8일 강원도 이천군(伊川郡) 서면(西面) 축동리(軸洞里)에서 태어났다. 천도교인이며, 1919년 4월 이천군 안협면(安峽面) 거성리(居城里)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1919년 4월 9일 같은 마을의 서당 훈도(訓導) 박용의(朴容義)와 함께 만세시위를 일으키기로 뜻을 모았다. 이들은 다음날 거성리 안협시장에 장이 서는 것을 기회로 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정하고 동지를 규합하였다. 저녁 9시 무렵 두 사람은 마을 구장(區長) 송원흥(宋元興)과 김응순(金應順)을 비밀리에 만나 만세시위 계획을 알렸다. 송원흥·김응순 모두 천도교인이었으며 특히 송원흥은 구장으로 마을 사람들에게 영향력이 있었기 때문에 송원흥에게 주민들을 동원하는 일을 맡겼다. 4월 10일 아침 80여 명의 주민들과 함께 거성리 안협시장으로 향하였다. 박용의가 선두에서 미리 준비한 태극기를 높이 흔들며 앞장섰으며 동료들과 함께 주민들을 이끌고 행진하여 장터에 이르렀다. 저녁 무렵 안협시장에 도착하여 장터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전개하였으며, 이후 장꾼들을 규합하여 안협헌병분견소로 나아갔다. 헌병분견소 앞에서 시위대와 함께 ‘독립만세’를 부르며 만세시위를 펼쳤다. 시위를 마친 뒤 자진 해산하여 일제 경찰과의 무력 충돌은 없었다. 이후 4월 12일 판교면(板橋面)과 13일에는 이천읍에서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박용의와 다음 만세시위를 계획하였다. 장터가 아닌 서면 사현리(四見里)에 있는 헌병분견소에서 만세시위를 펼치기로 결정하고 마을 주민들에게 만세시위 계획을 알리고 동참을 권유하였다. 4월 21일 수십 명의 마을 주민들과 함께 헌병분견소로 향하였다. 헌병분견소 앞에 이르러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펼쳤다. 박용의는 준비한 태극기를 펼치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쳤고 시위대와 함께 만세를 연호하였다. 시위 소식에 일제는 헌병과 경찰을 급파하여 무력을 행사하여 시위대를 해산시켰으며, 이 과정에서 일제 관헌에 붙잡혔다. 1919년 5월 22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0월을 받았다. 이에 항소하였으나, 그 해 7월 17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 재차 상고하였으나, 같은 해 9월 25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1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정상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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