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덕관
張德寬1887. 4. 7 ~ 1938. 12. 16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안성군 원곡면.양성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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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0) 1887년 4월 7일 경기도 진위군(振威郡) 송탄면(松炭面) 도일리(道日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당시 경기도 안성군(安城郡) 원곡면(元谷面) 내가천리(內伽川里)에 거주하였으며, 농업에 종사하였다. 4월 1일 안성군 원곡면·양성면(陽城面)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1919년 4월 1일 오후 이덕순으로부터 만세시위에 대한 내용을 전달받고, 남현서(南玄西)·최재옥(崔在玉) 등 같은 마을의 주민들과 함께 적극적으로 동의하여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이날 밤 원곡면의 각 마을에서 1,000여 명의 주민들이 외가천리(外伽川里)에 위치한 면사무소 앞에 집결하였다. 마을 주민들과 함께 이유석·홍창섭 등의 지휘에 따라 면사무소 앞에서 큰 목소리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만세시위 도중 이유석 등은 면사무소 안에 있던 면장 남길우(南吉祐)와 직원들을 밖으로 끌어내 그들에게 태극기를 쥐어주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게 했다. 만세시위대의 위세에 눌린 면장 남길우 및 면사무소 직원들이 순순히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치자 만세시위에 대한 열기는 더욱 올라갔다. 크게 고조된 만세시위의 분위기를 파악한 이유석·홍창섭 등의 주도자들은 “양성으로 가자”고 시위대를 향해 외쳤다. 과거 군청 소재지였던 양성면에는 일제의 경찰주재소, 우편소 및 양성면 면사무소 등 일제의 주요 시설이 위치해 있었다. 이유석·홍창섭 등 주도자들의 주장에 적극적으로 호응하여 다른 주민들과 함께 횃불을 밝히고, 시위대열을 형성하였다. 선두에 면장 남길우를 앞세우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양성면을 향해 행진하였다. 시위대가 양성면으로 넘어가는 성은고개의 정상에 도착하자, 이유석·이양섭 등의 주도자들은 시위행진을 일단 멈추고 집회를 개최하였다. 시위대의 휴식을 취할 겸 양성에서 새로운 만세시위를 전개하기 전에 원곡면 주민들의 만세시위 분위기를 더욱 끌어올리기 위함이었다. 이유석·홍창섭·이덕순·이근수·최은식 등이 차례로 주민들 앞으로 나와 일제의 식민통치를 비판하며 “면사무소, 주재소, 우편소 등은 모두 때려 부숴야 한다”, “일본인도 모두 쫓아 버려야 한다”는 등의 연설을 하였다. 주도자들의 연설에 크게 공감하여 돌멩이와 몽둥이 등 일제 시설을 공격할 도구를 준비하여 양성면을 향해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면서 행진하였다. 당시 양성면에서도 수백명의 주민들은 양성의 경찰주재소 앞에 모여 오후 9시경부터 소리 높여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만세시위를 전개하고 있었다. 늦은 밤까지 만세시위를 전개한 양성면의 주민들은 해산하려던 즈음, 성은고개에서 양성면쪽으로 횃불을 밝히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행진해 오는 원곡면의 시위대를 발견하였다. 이에 양성면의 주민들은 곧바로 해산을 중단하고, 원곡면 주민들과 합류하여 2,000여 명의 규모로 확대된 연합 만세시위대를 구성하였다. 두 지역 주민들의 연합으로 더욱 사기가 올라 큰 목소리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면서 대대적인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양성면의 주민들과 함께 일제 경찰의 주재소로 행진하여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주재소를 습격하자는 최은식의 외침에 호응하여 시위대의 선두에서 주재소에 대한 공격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최은식 등과 함께 주재소를 향해 돌을 던져 주재소의 창문 등을 깨뜨리고, 안으로 들어가 집기와 기물을 파손하고 주재소 건물에 불을 질러 완전히 소실시켰다. 다음으로 우편소로 향하여 집기와 기물을 밖으로 꺼내 소실시키고, 남현서와 함께 전신주를 도끼로 찍어 넘어뜨려 우편소의 통신을 마비시켰다. 그 후 지역의 주민들에게 평소 원성이 높았던 일본상인 토자토 토요테(外里與手)의 상점과 고리대금업자 다카 히데토모(隆秀知)의 자택을 습격하여 상점과 집안의 기물 및 가구들을 불태워 버렸다. 다음날인 4월 2일 새벽까지 격렬한 만세시위를 전개한 뒤, 원곡면으로 돌아와 원곡면 면사무소까지 소실시킨 후 해산하였다. 붙잡힌 뒤 재판에 회부되었다. 내란죄 적용 문제를 두고 오랜 조사와 공판이 이어졌다. 1920년 3월 22일 고등법원에서 내란죄를 적용하지 않기로 하고 경성지방법원으로 관할 재판소를 지정받았다. 같은 해 8월 10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변호사들의 사법 절차 문제 지적 법정투쟁의 결과 공소 불수리 처분을 받았다. 1921년 1월 2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 건조물 소훼, 소요 등으로 징역 3년(구류일수 중 500일 본형 산입)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한성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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