張良憲
張憲1898. 4. 19 ~ 1984. 8. 14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대통령표창(1997)
관련 사건
- · 충주군 충주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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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표창(1997) 1898년 4월 19일 충청북도 충주군(忠州郡) 충주면(忠州面) 읍내리(邑內里, 현 충주시 문화동)에서 태어났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1919년 만세운동 당시 서울의 신학교에 재학 중이었다. 1919년 3월 15일 충주군 충주면 칠금리(漆琴里) 만세운동을 계획하였다. 충주의 만세운동은 충주간이농업학교의 교사와 학생들을 중심으로 추진되었다. 1919년 3월 10일경 호암리(虎岩里)의 범바위에서 충주간이농업학교의 졸업기념 야유회가 열렸다. 3월 1일 이래 서울을 시작으로 전국적인 만세운동이 전개되고 있다는 사실을 이미 인지하고 있던 교사 유흥식(柳興植)과 학생 오언영(吳彦泳)·장천석(張千石)·유석보(劉錫寶) 등은 이 야유회에 참석하여 만세운동에 대해 의견을 교환하고, 의기투합하여 충주의 만세운동을 결의하였다. 이들은 만세운동의 거사일을 충주의 칠금리 장날인 3월 15일로 결정하고, 그 준비를 진행하였다. 그리고 만세운동의 논의를 확대하여 충주공립보통학교 학생들 및 기독교계 인사들과 협력하여 대대적인 만세운동을 계획하였다. 서울의 신학교에 재학하던 중 서울에서 전개되고 있던 만세운동에 참여한 후, 충주로 귀향하였다. 고향으로 만세운동을 확산시키려는 결의에서 만세운동의 동참할 것을 촉구하는 「경고문」을 가지고 와서 교회 안에서 수백 매를 등사하였다. 이미 충주의 기독교계도 충주간이농업학교 교사와 학생들이 추진하는 만세운동에 함께 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에, 당시 「경고문」의 등사는 자연히 충주간이농업학교 학생들과 연계되어 진행되었다. 충주간이농업학교 학생이자 기독교신자였던 유석보가 매개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대대적으로 준비되었던 만세운동 계획이 일제의 헌병보조원 채용을 약속받은 사람의 밀고로 일제 당국에 발각되어 실패하였다. 그럼에도 당시 교회 안에서 비밀리에 등사된 「경고문」은 충주의 각지로 배포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기독교계 인사들과 체포를 면한 충주간이농업학교 학생들 등을 중심으로 만세시위의 장소를 탄금대로 변경하여 새롭게 만세운동 준비를 진행하였다. 그리고 충주공립보통학교의 교사 및 학생들의 참여를 독려하기 위해 김종부(金鍾富)·오언영 등과 함께 4월 8일경 충주공립보통학교 여교원 김연순(金連順) 앞으로 독립운동의 권유문을 보내기로 결정했다. 이때 만들어진 태극기와 「경고문」, 독립가 등은 오언영의 여동생을 통해 김연순에게 전달되었다. 이때의 만세운동 계획을 일제 경찰에 사전 발각되어 결국 실패하였다. 이 과정에서 김종부·오언영 등과 함께 일제 경찰에 붙잡혀 재판에 회부되었다. 1919년 5월 31일 공주지방법원 청주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한 결과, 같은 해 7월 16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6개월로 감형되었다. 재차 상고하였으나, 그해 9월 25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서대문감옥에서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한성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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