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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영필

張永弼

1878 ~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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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장영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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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 황주(黃州)3.1운동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황해도 황주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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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애족장(2007)

관련 사건

  • · 황주군 황주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2007) 황해도 황주군(黃州郡) 구성면(九聖面) 용종리(龍宗里) 출신이다. 판결문에 따르면 1919년 당시 42세이므로 1878년생으로 추정된다. 고향에서 농업에 종사하였으며, 1919년 3월 2일 황주군 황주면 남천 장터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1919년 3월 1일 황주군 황주면(黃州面) 천도교구는 서울을 비롯해 전국적으로 일어난 만세운동 소식을 접하였다. 이에 황주읍 천도교구의 김성준(金聲駿)과 교훈(敎訓) 황기타(黃己拕)는 천도교인과 황주면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3월 2일 일요일에 남천 장터에서 만세운동을 하기로 결의하였다. 황기타와 김성준은 평소 독립을 열망하였던 황주면 내 인사들에게 3월 2일 만세운동 계획을 전하고 참여를 약속받았다. 그때 만세운동 참여를 약속한 인사는 황주면 황강리(黃崗里)의 최석길(崔錫吉)과 김광섭(金光燮), 성남리(城南里)의 김병식(金炳植), 벽성리(碧城里)의 조진영 등이었다. 3월 2일 오후 2시경 남천 장터에서 만세시위가 시작되자, 황기타는 천도교인들을 이끌고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면서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조진영은 독립선언서의 취지를 연설하면서 남천 장터에 모인 사람들의 시위 참여를 독려하였다. 이때 남천 장터의 만세운동에 시위대의 일원으로 참여하여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행진하였다. 시위대는 남천 장터를 지나서 행진하던 중에 황주 경찰서에서 일제 경찰들과 대치하였다. 시위의 확산을 막기 위해서 일제 경찰은 시위대의 행진을 막았으며, 그 과정에서 시위대 일원이었던 김병식과 강형섭(康亨燮)을 구금하였다. 이에 시위대는 이들의 석방을 요구하면서 저항하였으며, 표정일·이준근·최석길은 시위대 40여 명을 이끌고 황주 경찰서로 진입하였다. 경찰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시위대는 경찰서 집기를 부수는 등의 저항을 하였다. 황주 경찰서에서 시위를 마친 다음 시위대와 함께 대오 정비를 목적으로 예수교 예배당으로 이동하였다. 예배당에서 시위대가 ‘독립만세’를 외치자, 예수당에 있던 예수교인들이 시위대에 합류하였다. 이후 시위대는 천도교구실로 이동해서 휴식을 취하였다. 황주 경찰서는 시위의 확산을 막고 시위대 참여자의 색출을 위해서 인근 지역에 증원을 요청하고, 관내 소방조(消防組)까지 투입하였다. 오후 5시에는 일제 경찰과 헌병을 동원해서 천도교구실을 급습하는 과정에서 현장에서 붙잡혔다. 그때 시위대 80여 명이 함께 체포되었는데, 그 중에는 시위 주도자 황기타·최석길·김광섭·표정일도 포함되어 있었다. 일제 경찰에 의해서 천도교구실에서 붙잡힌 직후 평양지방법원으로 압송되었다. 평양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과 소요죄로 징역 1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본인의 행위는 어디까지나 조선민족의 의무이므로 죄가 될 이유가 없다”면서 항소하였으나, 1919년 5월 29일 평양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 재차 상고하였지만, 그해 7월 12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7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한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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