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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원심

張元心

1887. 11. 29 ~ 1939. 3.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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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장원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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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안성(安城)3.1운동

지도 위치

시·군·구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기도 안성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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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애족장(1992)

관련 사건

  • · 1919년 안성군 원곡면
  • · 양성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2) 1887년 11월 29일 경기도 안성군(安城郡) 내가천리(內加川里)에서 태어났다. 농업에 종사하였다. 이명은 장원정(張元正)이다. 1919년 4월 1일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元谷面)·양성면(陽城面) 일대에서 전개된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1919년 3월 1일 시작된 만세운동은 곧바로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안성군에도 전파되었다. 특히 원곡면과 양성면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함께 양성군(陽城郡)에 속했던 지역으로 주민들의 동향의식이 높았다. 이를 바탕으로 같은 해 4월 1일부터 4월 2일 새벽까지 더불어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 만세시위는 칠곡리의 이유석(李裕奭)·홍창섭(洪昌燮), 외가천리(外加川里)의 최은식(崔殷植)·이희용(李熙龍)·이근수(李根洙), 내가천리(內伽川里)의 이덕순(李德順), 죽백리(竹栢里, 현 평택시 죽백동)의 이양섭(李陽燮) 등의 주도로 원곡면에서 먼저 시작되었다. 4월 1일 오후 이덕순·남현서(南玄西) 등으로부터 만세시위 계획을 전달받고, 곧바로 동의하고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그리고 만세시위 참여한 마을 사람들과 함께 저녁 무렵 원곡면사무소로 향하였다. 원곡면의 각 마을에서 약 1,000여 명의 주민들이 외가천리에 위치한 면사무소 앞으로 집결하였고, 이들과 함께 소리 높여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유석·홍창섭 등 주도자들은 면장 남길우(南吉祐)를 비롯한 면사무소 직원들이 사무실 안에 있다는 것을 파악한 후, 이들을 밖으로 끌어내 태극기를 건네주며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도록 하였다. 면장 남길우 등이 순순히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치자 만세시위 분위기는 한껏 고조되었다. 이에 고무된 이유석·홍창섭 등 주도자들은 주재소·우편소 등 일제의 주요 시설이 위치해 있는 양성면으로 가서 함께 만세시위를 전개하자고 외쳤다. 이에 적극 호응해 시위대와 더불어 면장 남길우를 선두에 앞세우고 ‘대한독립만세’를 연창하며 양성면으로 행진하였다. 시위대가 양성면과 접한 성은고개 정상에 도착하자 이유석 등 주도자들은 행진을 멈추고 휴식을 취하면서 시위 대열을 재정비하기 위해 집회를 개최하였다. 이유석·홍창섭·이덕순·이근수·최은식 등이 차례로 나와 일제의 식민통치를 규탄하며, 돌이나 몽둥이 등을 준비해 일제의 시설을 파괴하고 일본인을 쫓아버려야 한다고 연설하였다. 주도자들의 결의에 찬 연설에 크게 공감해 시위대과 함께 돌맹이와 몽둥이 등을 준비하고 양성면으로 이동하였다. 양성면에서도 밤 오후 9시 경부터 수백 명의 주민들이 양성경찰주재소 앞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하고 있었다. 원곡면의 시위대는 성은고개를 내려가 곧바로 양성면에서 만세시위를 펼치고 있던 주민들과 합류하였다. 그리고 2,000여 명으로 확대된 시위대와 함께 이유석·홍창섭 등의 지휘에 따라 ‘대한독립만세’를 힘껏 부르면서 양성주재소로 이동하였다. 시위대의 선두에서 주재소 공격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최은식 등과 함께 주재소를 향해 돌을 던져 유리창과 기물 등을 파손하였다. 이후 양성우편소로 이동해 돌을 던지고, 내부의 집기 등을 모두 밖으로 꺼내 불태웠다. 이어서 평소 지역민들에게 원성이 높았던 일본인 도자토 도요테(外里與手)의 상점과 고리대금업자 다카 히데토모(隆秀知)의 집을 공격하고, 상점과 집 안의 물건들을 모두 밖으로 꺼내 소각하였다. 이후 시위대와 함께 다음날인 4월 2일 새벽까지 만세시위를 지속하다가 오전 4시경 원곡면으로 돌아와 면사무소 숙직실에 불을 지르고 서류와 물품을 모두 불태운 후 해산하였다. 다음날인 4월 3일 일제는 조선주차군 제79연대 30여 명의 병력을 파견해 만세시위 참여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조사와 색출 활동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붙잡혀 조사를 받고 이유석·홍창섭 등과 함께 이른바 내란죄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내란죄 적용 문제를 두고 오랜 조사와 공판이 이어지다가, 1920년 3월 22일 고등법원에서 내란죄를 적용하지 않기로 하며 경성지방법원으로 관할 재판소를 지정받았다. 같은 해 8월 10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변호사들의 법정투쟁의 결과 공소 불수리 처분을 받았다. 1921년 1월 2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 건조물 소훼, 소요죄 등으로 징역 2년 6월(구류일수 중 500일 본형 산입)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2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한성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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