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정수
張正秀1902. 12. 12 ~ 1965. 4. 6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대통령표창(1992)
관련 사건
- · 창녕군 영산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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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표창(1992) 1902년 12월 12일 경상남도 창녕군(昌寧郡) 영산면(靈山面) 죽사리(竹沙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당시 농업에 종사하였으며, 3월 13일 창녕군 영산면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1919년 3월 1일에 서울 등지 7개 도시에서 일제히 만세운동이 발발하였다. 만세시위의 전국적 확산을 목적으로 천도교 중앙총부는 각 지역의 천도교구에 만세시위를 독려하였다. 신석구(申錫九)와 고성 출신 황태익(黃泰益)의 권유를 받은 창녕 지역 천도교인들은 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심하였다. 구중회(具中會)·김추은(金秋銀)·장진수(張振秀)는 3월 13일 영산읍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들은 비밀리에 만세시위에 사용할 태극기와 ‘대한독립만세’가 쓰여진 대형 깃발을 준비하였다. 3월 13일 오후 2시에는 개춘회(開春會)를 연다고 하면서, 만세시위를 주도할 결사단원 23명과 영산 앞의 남산봉에 집결하였다. 이때 결사단원의 일원으로 남산봉에서 열린 비밀 집회에 참여하였다. 결사단원과 함께 완전한 독립주권국 쟁취를 선언한 ‘결사단원 맹세서’에 서명하였다. 하지만 3월 12일 구중회 집에서 열린 비밀 회합에 관한 정보를 입수한 창녕경찰서가 경찰력을 남산봉으로 출동시켰다. 남산봉에 도착한 일제 경찰은 결사단원을 체포하려고 하였다. 이때 동지들과 함께 일제 경찰의 총검을 빼앗고 일부를 미나리 강에 빠뜨렸다. 결사단원과 일제 경찰의 충돌이 전해지자 많은 군중이 남산봉 인근에 집결하였다. 동지들과 함께 태극기를 나누어주면서 시위를 이끌었다. 시위대의 일원으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면서 행진하였다. 창가(唱歌) 전진가(前進歌)를 부르면서 영산면내로 진입하였다. 보통학교 졸업자, 노동자 등이 시위대에 합류하였다. 시위대원들은 주재소를 포위하였으며, 일본인 상점에 대한 공격도 감행하였다. 오후 6시경에 구중회의 연설을 끝으로 시위대는 해산하였다. 시위대가 자진 해산 했음에도 창녕경찰서는 추가 병력을 영산면으로 급파하여 시위 주도자를 색출하였다. 이 과정에서 구중회, 김추은, 장진수가 일제 경찰에 의해서 창녕경찰서로 연행되었다. 이들의 연행 소식이 알려지자, 같은 날 저녁 8시 경에 남경명(南景明) 등 결사단원 20명과 함께 남산봉에 집결하였다. 그들과 함께 창녕경찰서로 연행된 인사들을 구출하기로 결의하였다. 시위대의 일원으로 만세시위를 외치면서 행진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일제 경찰과 육박전 혹은 투석전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일제 경찰의 강경 진압으로 연행자 구출 계획을 달성할 수 없었다.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는 이유로 일제 경찰에 붙잡혀 재판에 회부되었다. 1919년 5월 24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을 받았다. 이에 상고한 결과, 그해 6월 25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8월로 감형받았다. 재차 상고하였으나, 같은 해 9월 8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한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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