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채남
張彩南1895. 6. 8 ~ 1923. 11. 2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3)
관련 사건
- · 청진부 선언문 배포 및 청진부 신암동(新巖洞) 만세시위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3) 1895년 6월 8일 함경북도 청진부(淸津府) 포항동(浦項洞)에서 태어났다. 1919년 당시 운송업에 종사하였다. 3월 23일 청진부 포항동 일대에서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청진부 신암동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서울에서 청진부로 귀향하는 도중에 원산에서 독립선언서를 확보하였다. 집을 방문한 윤학송(尹學松)과 서성칠(徐星七)에게 독립선언서를 보여주었으며, 더불어 서울을 비롯한 여러 지역에서 만세시위가 전개되고 있다는 사실을 이야기해주었다. 나아가 윤학송과 서성칠과 함께 만세운동을 일으키기로 결의하였다. 3월 22일 장두량(張斗良)과 함께 독립선언서를 원본으로 하되 ‘조선민족독립단 청진(朝鮮民族獨立團 淸津)’이라는 서명을 추가한 상태로 청암면사무소의 등사판으로 독립선언서를 약 1,000장 인쇄하였다. 또한 만세시위에 사용할 태극기 100여 기를 제작하였다. 3월 23일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윤병후를 비롯한 동지에게 배부하였다. 아울러 3월 25일에 만세시위를 전개하자고 결의하였다. 하지만 순찰 중인 일제 경찰이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발견하고 이를 압수하였다. 이로 인해 3월 28일 만세시위를 전개하려는 계획은 실현되지 못하였다. 3월 28일 윤병후의 집에서 열린 회합에 참여하였다. 윤학송·서성칠·장두량·민기수(閔箕秀)·윤병후와 협의한 끝에 3월 31일 신암동에서 만세시위를 일으키기로 결의하였다. 우석구(禹錫九)와 최재훈(崔在勳)은 만세시위에 사용할 대형 태극기 1기와 소형 태극기 100여 기를 제작하였다. 3월 31일 정오 무렵 신암동에 위치한 윤학송의 집 마당에서 400여 명의 군중이 집결한 가운데 만세시위가 시작하였다. 윤병후와 함께 소형 태극기를 시위대에 나누어주었다. 선두에서 대형 태극기를 흔들며 시위대를 인솔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시위대는 신암동 일대를 행진하였으며, 윤병후와 김장환(金章煥)은 현장에서 시위대를 향해서 한국 독립에 관련한 연설을 하였다. 그러자 일제 군경이 출동해서 시위대의 해산을 명령하고 만세시위를 주도한 인사들을 체포하였다. 오후 1시 30분 무렵에 시위대도 일시적으로 해산하였다. 오후 3시 경 윤병흥(尹炳興)을 비롯한 개신교 신자들이 주도하는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이 만세시위는 검거된 만세시위 참여자와 주도자를 석방하기 위한 목적에서 이루어졌다. 하지만 이 역시 일제 군경이 시위 진압과 시위 주동자를 연행함으로써 당초 목적을 달성할 수 없었다. 일제 군경에 의해서 청진부 선언문 배포와 청진부 신암동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는 이유로 붙잡혀 재판에 회부되었다. 1919년 4월 21일 함흥지방법원 청진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과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형을 받았다. 이에 항소한 결과, 같은 해 5월 24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을 취소되고 징역 1년을 받았다. 이에 상고하였으나, 그해 6월 21일 고등법원에서 상고를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1923년 28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3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한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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