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태수
張兌秀1896. 7. 12 ~ 1974. 8. 24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1919년 개성군 상도면‧대성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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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0) 1896년 7월 12일 경기도 개성군(開城郡) 상도면(上道面) 풍천리(楓川里)에서 태어났다. 이명은 한자가 다른 장태수(張台秀)이다. 고향에서 농업에 종사하였으며, 1919년 3월 29일 상도면과 대성면(大聖面)의 연합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1919년 3월 29일 밤 개성 지역의 상도면과 대성면에서는 두 지역의 주민들이 연합하여 풍덕 헌병주재소를 포위하고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며, 일제의 통신시설을 파괴하는 등 격렬한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일제의 식민지 농업정책에 대한 농민들의 불만은 면단위를 넘어서는 공통적인 것이었다. 일제의 식민 지배에 대한 불만의 공감은 지역 간 연합시위를 가능하게 하는 요인이 되었다. 개성 지역은 33인의 민족대표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서울을 제외하고, 3월 1일 이전에 전국에서 유일하게 독립선언서가 배포된 지역이었다. 다른 지역에 비해 일찍 독립선언서를 전달받은 개성 지역에서는 3월 3일부터 군청소재지인 송도면(松島面)의 호수돈여학교(好壽敦女學校)의 여학생들을 중심으로 만세시위가 시작되었다. 초기의 만세운동은 3월 7일까지 격렬한 시위가 지속되었는데, 이때가 개성의 제1차 만세운동 고양기였다. 이후 소강상태에 들어갔던 개성 지역의 만세운동은 3월 초 송도면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던 만세운동의 소식이 개성의 각 지역으로 전파되면서 3월 23일부터 4월 초까지 개성군 내에서 동시다발적으로 격렬한 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 이 시기가 개성의 제2차 만세운동 고양기라고 할 수 있다. 상도면과 대성면의 연합만세시위는 개성 지역의 제2차 만세운동 고양기의 시기였던 3월 29일 밤에 전개되었다. 3월 초순에 전개되었던 호수돈여학교 여학생들의 만세시위와 송도면의 만세시위 소식을 전해 듣고, 풍천리의 장경범(張慶範)·김순흥(金順興)·유기윤(柳冀允)·이만석(李萬錫)·장승화(張承和)와 연동리(蓮洞里)의 이기춘(李起春)·신선명(申善明) 등과 함께 논의하여 만세시위를 조직하고 주도하였다. 이날 밤 즉시 유기윤·김순흥·이기춘 등의 동지들과 함께 주민들에게 독립의 취지를 알리고, 만세운동에 참여할 것을 호소하여 만세시위에 돌입하였다. 만세시위에 참여한 주민들을 지휘하여 상도면의 상도리에서 대성면의 풍덕리(豊德里) 읍내까지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면서 만세시위 행진을 전개하였다. 큰 목소리로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며 행진하는 만세시위대의 모습을 보고, 대성면 풍덕리의 주민들도 속속 만세시위에 동참하여 시위대의 규모는 300여 명으로 확대되었다. 이로써 상도면의 만세시위는 상도면과 대성면의 주민들이 모두 참여한 연합만세시위로 발전하였다. 유기윤·김순흥·이기춘 등과 함께 규모가 확대된 시위대를 이끌고 풍덕리에 소재한 일제의 풍덕헌병분견소로 행진하였다. 시위대의 선두에서 주민들을 지휘하여 헌병분견소 건물을 포위하고, ‘조선독립만세’를 연창하였다. 다수의 주민들이 헌병분견소를 포위하여 격렬하게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는 만세시위를 전개하자, 이에 당황한 일제 헌병은 개성의 헌병대 본부로 전화하여 지원 병력의 파견을 요청하였다. 이는 만세시위대를 더욱 크게 자극하였다. 유기윤·김순흥·이기춘 등과 함께 일제 헌병대의 통신을 방해하기 위해 전화선과 전주를 파괴하도록 만세시위대를 지휘하였다. 개성헌병대에게서 지원병이 파견되어 주민을 체포하게 될 것임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주도 인물 중 한 사람이 “저 전화줄을 끊어라. 개성으로 전화하여 우리를 잡으러 온다”고 외쳤다. 이에 만세시위대는 대성면 광덕리(光德里) 소재 한다리(漢橋) 부근의 전주와 대성면 신죽리(新竹里)의 개성, 풍덕, 영정포(領井浦)로 통하는 교차로 부근의 전주 등 개성, 풍덕 사이의 전화선과 전주 3개를 찍어 넘기거나, 쓰러뜨렸다. 일제 헌병대는 만세시위대의 격렬한 시위가 일제 통신시설을 공격하여 직접적으로 통신에 방해를 받게 되자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적인 발포를 시작하였다. 더욱 분노한 시위대를 지휘하여 헌병분견소에 대한 습격을 시도했으나, 총기를 난사하는 일제 헌병대에 대해 만세시위대가 비무장을 대항하기는 무리였다. 헌병분견소에 대한 습격 시도는 실패하였고, 일제 헌병대가 발포하는 상황에서 시위대는 해산되기 시작하였다. 이때 유기윤·장경범·김기흥·이기춘 등과 함께 일제 헌병대에 붙잡혔다. 일제 헌병의 조사 과정에서 만세시위의 주도자 중 한 사람으로 파악되어 재판에 회부되었다. 1919년 5월 22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전신법 위반을 이유로 징역 3년 6월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함에 7월 28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은 취소되고, 징역 2년으로 감형되었다. 이와 같은 판결에 “자신들의 행위는 조선민족으로서 정의, 인도에 기초하는 의사 발동으로 범죄가 아니다. 제1심과 제2심에서 받은 유죄판결은 복종할 수 없는 위법”이라는 취지로 상고하였다. 이에 대해 10월 16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한성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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