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학관
張學觀미상 ~ 1919. 3. 13
포상 정보
- · 애국장(1991)
관련 사건
- · 1919년 옌지현 용정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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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장(1991) 자료의 한계로 정확한 출생일시와 출신지는 현재 확인되지 않는다. 1919년 당시 중국 지린성(吉林省) 옌지현(延吉縣) 용정촌(龍井村) 부근 의란구(依蘭溝)에 거주한 것으로 보인다. 1919년 3월 13일 북간도 지역에서 최초로 전개된 용정 서전대야(瑞甸大野)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가 희생되었다. 북간도 지역에는 일찍부터 삶의 터전을 일구기 위해 국내에서 이주해 간 한인들이 많이 거주하였다. 1910년 이후 일제의 식민지가 본격화되면서 다양한 이유로 국경을 넘는 이들이 증가하였고, 특히 일제의 감시를 피해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투신하고자 하는 반일 성향의 한인들이 다수 북간도로 생활 터전을 옮겼다. 이곳에 정착한 한인들은 기독교 계통의 종교적인 배경을 지닌 사람들이 많았다. 1919년 1월 25일 국자가(局子街) 소영자(小營子)에서 개최된 기독교 대전도회 총회에서는 각 지역을 대표할 수 있는 지역대표를 선정하기로 결의하였다. 이후 2월 18일과 2월 20일 국자가에 있는 박동원(朴東轅)의 집에서 독립운동가 33인이 비밀리에 회합하고, 북간도 지역에서 전개하게 될 운동에 대해 논의하였다. 3월 1일 서울 등에서 거행된 만세운동 소식은 곧바로 국내 각지로 퍼져나갔고, 북간도 지역에도 국내보다 며칠 늦은 3월 7일경 전달되었다. 이에 호응해 북간도에서도 만세시위를 계획하기 위해 비밀리에 회의가 개최되었다. 그리고 ‘조선독립축하회’라는 명목으로 3월 13일 정오 옌지현 용정촌에서 만세시위를 거행하기로 결의하였다. 한편 3월 10일에는 명동학교(明東學校)를 비롯해 북간도 지역의 여러 학교에서 학생들이 동맹휴학을 결의하였다. 만세시위 당일인 3월 13일이 되자 독립축하회장으로 정해진 용정촌 서전대야에 인근 지역에서 거주하던 한인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예정 시각인 정오가 되자 대회장 김영학(金永學)이 먼저 독립선언포고문을 낭독하였고, 이것을 시작으로 모여든 한인들이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행진하는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때 만세시위 행렬의 선두에서 ‘독립’을 부르짖으며 ‘만세’를 외쳤다. 그러나 현장에는 일제의 사주를 받은 멍푸더(富德) 보병단장을 위시한 중국 군대가 무장한 채 시위대와 대치하고 있었다. 만세시위가 진행되던 중 중국 군대가 발포를 시작하였고, 이때 총격을 받고 그 자리에서 사망하였다. 3월 17일 희생된 사람들의 유해를 수습한 한인들에 의해 다른 사망자들과 함께 용정촌에서 남쪽으로 10리 가량 떨어진 허청리(虛淸里)에 매장되었다. 1920년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로부터 고인의 뜻을 기리는 포충장(褒忠狀)이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 회장인 구춘선(具春先)을 통해 유족에게 전달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윤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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