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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호리

張浩利

1895. 7. 12 ~ 1971. 2.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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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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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가평(加平)3.1운동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기도 가평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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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애족장(1995)

관련 사건

  • · 가평군(3.15
  • · 3.16) 3.1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5) 1895년 7월 12일 경기도 가평군(加平郡) 북면(北面) 도대리(道大里)에서 태어났다. 목동리(沐洞里)에서 서당의 훈장이자, 마을 구장이었던 이규봉(李圭鳳)의 문하에서 한학을 공부하였고, 농업에 종사하였다. 1919년 3월 15·16일 가평군 북면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1919년 3월 이규봉은 서울로 상경하여 고종의 장례식에 참례하고 가평 출신의 천도교계 인사들로부터 독립선언서 2장과 『독립신문』 1부를 수령하여 3월 6일 목동리 자택으로 귀향하였다. 집으로 돌아온 이규봉이 아들 이윤석(李胤錫) 및 제자 정흥교(鄭興敎)에게 서울의 만세운동의 상황과 함께 독립선언서 및 『독립신문』을 전달하고, 가평에서 만세운동의 실행을 당부하였다. 이 자리에서 즉각적으로 만세운동을 결의한 이윤석과 정흥교는 만세운동을 함께 할 동지의 규합에 착수하면서, 각각 북면 내의 지역을 나누어 만세운동에 대한 지역의 여론 환기에 나섰다. 정흥교가 적목리(赤木里)·단녕리(湍寧里)·과대리(過大里)·백비리(柏比里)·도대리를, 이윤석은 목동리·화악리(華岳里)·소법리(所法里)·이곡리(梨谷里)를 담당하였다. 이때 정흥교로부터 서울의 만세운동 상황을 전달받는 동시에 만세운동의 조직에 참여할 것을 권유받고 적극적으로 호응하였다. 친형인 장호형(張浩亨)·정흥교의 동생인 정성교(鄭聖敎)·이만석(李萬錫)·정재명(鄭在明)·최종화(崔宗和)와 최용화(崔容和) 형제 등을 비롯한 30여 명의 동지들과 함께 만세운동에 참여하기로 결의하였다. 곧이어 이들과 회의를 통해 가평읍(加平邑)의 장날인 3월 15일 아침 북면 면사무소 앞에서 모여 만세시위의 대열을 형성하고, 읍내의 가평군청으로 행진하여 만세운동을 전개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이후 이윤석과 정흥교는 「밀통(密通)」이라는 제목으로 3월 15일 아침 9시에 가평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한다는 내용의 격문을 작성하여 북면의 각 지역으로 배포하였다. 격문의 배포는 정기복(鄭基福)과 이만석, 정재명 등이 담당하여 만세운동의 하루 전인 3월 14일 목동리·화악리(華岳里)·소법리 등 가평군 북면 내의 각 지역에 일제히 배포 혹은 구두로 전달하여 주민들의 참여를 독려하였다. 3월 15일 아침 대형 태극기를 앞세우고 이윤석·정흥교·장기영(張基榮)·장호영 등의 동지들과 함께 북면 면사무소 앞에 집결하였다. 사전에 만세시위에 대한 소식을 전달받은 많은 주민들이 동참하기 위해 모였다. 대형 태극기를 중심으로 정흥교·장기영·이만석·최종화(崔宗和) 등과 함께 10여 장의 태극기를 나눠 들고 흔들면서 주민들의 사기를 높이고,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였다. 이후 시위대열을 갖추어 대형 태극기를 앞세우고 ‘대한독립만세’를 연창하면서 가평군청을 향해 행진하였다. 가평군청 앞에 도착한 후 이윤석의 독립선언서 낭독을 시작으로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이규봉의 만세 선창에 따라 시위대 전체가 ‘대한독립만세’를 크게 따라 외쳤다. 이러한 만세시위의 모습을 보고, 공감한 읍내의 많은 주민들이 계속적으로 만세시위에 참여하여, 시위대의 규모는 곧 수백 명으로 확대되었다. 이윤석·정흥교·장기영·장호영 등과 함께 선두에서 시위대를 이끌고, 공립학교, 군내면 면사무소 등으로 행진하며 가평군 읍내의 곳곳에서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대규모 만세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가평헌병분견소의 일제 헌병대가 출동하여 시위대에 즉각 해산을 명령했으나, 이를 거부하고 주민들과 함께 계속적으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만세시위 주도자들의 체포 기회를 노리던 일제 헌병들은 저녁 8시경 시위대가 해산하기 시작하자, 즉각 출동하여 이윤석과 정흥교 등 10여 명의 시위 주도자를 검거하였다. 이에 분노하여 장기영, 장호형 등과 함께 헌병분견소로 쫓아가서 구속자의 석방을 요구하였으나, 일제 헌병들은 시위대의 요구를 수용하지 않았다. 이후 장기영의 제안에 따라 이날은 일단 해산하고, 다음날인 16일 아침 일찍 구속자들의 석방을 위한 목동리의 모임에 친형 장호형과 함께 참석하였다. 전날 시위에서 붙잡히지 않은 주도자들 및 만세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주민들 약 200명이 모였다. 헌병분견소에 가서 동지들의 석방을 요구하자는 장기영의 의견에 동의하여 200여 명의 참여자들을 이끌고 가평헌병분견소로 향하였다. 한참 행진하던 도중 목동리의 당고개[祭堂峴]에서 헌병 오장 마쓰모토 긴죠(松本銀藏)가 이끄는 헌병대와 조우하였다. 헌병대는 총기를 발포하며 즉각 해산을 명령하였지만, 이에 불응하고 장기영·장호형·정성교 등과 함께 200여 명의 주민들을 지휘하며 선두에서 투석으로 일제 헌병대에 격렬하게 맞섰다. 시위대가 격렬히 저항하자 일제 헌병은 보병부대에 지원을 요청하였고, 곧이어 구리하라(栗原) 중위가 이끄는 지원 병력이 도착하였다. 일제의 병력이 증원되자 결국 장기영·정성교·장호형 등과 함께 일제 헌병에 붙잡혀 조사받은 후 법원으로 송치되었다. 1919년 4월 2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 등으로 징역 1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그해 7월 14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 이에 다른 동지들과 다시 상고하였으나, 같은 해 9월 25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한성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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