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호조
張鎬祚1896. 2. 25 ~ 1942. 3. 15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조선독립광주신문 발행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1896년 2월 25일 전라남도 영광군(靈光郡) 백산면(白山面) 양성리(良城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무렵 전남 광주군 효천면(孝泉面) 양림리(楊林里)에 거주하면서 제중원(濟衆院) 제약사로 근무하였다. 이명은 장호조(張浩祚)이다. 1919년 3월 13일과 3월 18일 두 차례에 걸쳐 직접 제작한 『조선독립광주신문(朝鮮獨立光州新聞)』을 배포하였다. 3월 10일 광주 읍내에서 발생한 만세운동은 정광호(鄭光鎬)·김강(金剛)·김철(金鐵)·남궁혁(南宮爀) 등이 준비를 시작하여 숭일학교(崇一學校)·수피아여학교(須皮亞女學校)·광주농업학교(光州農業學校) 학생들이 참여하는 형태로 진행되었다. 이날의 시위에는 1,000여 명이 넘는 사람들이 참여하였으며, 일제 기마헌병대의 강압적인 해산으로 많은 부상자를 낸 채로 종료하였다. 이때 3월 10일의 만세운동 준비에 참여했던 제중원 회계 담당 황상호(黃尙鎬)가 운동이 한 번으로 멈춰서는 안 된다며 당일 거리에 배포되었던 윤익선(尹益善) 명의의 『독립신문(獨立新聞)』 1, 2호를 본따 광주 지역의 독립신문을 만들어 배포할 것을 권유하였다. 이에 제중원 간호사였던 홍덕주(洪德周)와 함께 힘을 보태기로 결정하였다. 3월 11일, 황상호의 집에서 『조선독립광주신문』 제1호를 제중원 소유 등사판을 활용하여 300부를 인쇄하고, 13일 광주 시내에 배포하였다. 앞면과 뒷면, 총 2면으로 이루어진 이 신문은, 독립운동을 영속(永續)하여 최후의 1인까지 목적을 관철할 것, 고종 독살설을 비롯한 민족자결주의의 내용과 일본 동화주의의 실패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어 3월 14일과 15일에는 한국인이 모두 단결하여 자유를 회복해야 함과 학생들의 추가적인 궐기를 촉구하는 내용을 담은 『조선독립광주신문』 제2호를 300부 등사하여 18일 장날을 이용하여 배포하였다. 이 과정에서 붙잡혀서 심문을 받고 재판에 넘겨졌다. 1919년 5월 8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2년 6월을 받았다. 이에 항소하였으나 1919년 6월 11일 대구복심법원에서도 징역 2년 6월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풀려난 이후에도 광주 일대에서 기독교청년회에 속해 농촌교육문제 등에 관심을 가지고 활동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이지원⋮
국어사전
원문에서 어려운 낱말을 선택하거나 직접 검색해 보세요.
낱말을 검색하면 뜻풀이가 여기에 표시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