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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호형

張浩亨

1893. 6. 7 ~ 1950. 10.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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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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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가평(加平)3.1운동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기도 가평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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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애족장(1995)

관련 사건

  • · 1919년 가평군 북면
  • · 군내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5) 1893년 6월 7일 경기도 가평군(加平郡) 북면(北面) 목동리(沐洞里)에서 태어났다. 서당 훈장이자 마을의 구장이었던 이규봉(李圭鳳)에게 동생 장호리(張浩利)와 함께 한학을 배웠고, 농업에 종사하였다. 1919년 3월 15일과 16일 가평군 북면과 군내면(郡內面) 읍내에서 전개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이규봉은 서울로 올라가 고종의 인산(因山)에 참례하고, 가평 출신 천도교 인사들로부터 독립선언서 2장과 『독립신문』 1부를 받아서 3월 6일 귀향하였다. 이규봉은 아들 이윤석(李胤錫)과 제자 정흥교(鄭興敎)에게 서울의 만세운동에 대해 말하며 독립선언서와 『독립신문』을 전달하고 만세시위의 실행을 당부하였다. 이에 이윤석과 정흥교는 만세시위를 일으키기로 결의하고, 동지를 규합하면서 북면 내의 지역을 각각 나누어 알리기로 하였다. 정흥교는 적목리(赤木里)·단녕리(湍寧里)·과대리(過大里)·백비리(柏比里)·도대리를·이윤석은 목동리·화악리(華岳里)·소법리(所法里)·이곡리(梨谷里)를 담당하였다. 이윤석과 정흥교로부터 거사 제안을 받고, 장호리와 정흥교의 동생 정성교(鄭聖敎)·이만석(李萬錫)·정재명(鄭在明)·최종화(崔宗和)·최용화(崔容和) 등 30여 명과 함께 참여하기로 하였다. 동지들과 논의를 통해 가평 읍내 장날인 3월 15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북면사무소 앞에서 모인 후 군내면 읍내에 위치한 가평군청까지 행진하는 만세시위를 계획하였다. 이를 위해 이윤석과 정흥교는 「밀통(密通)」이라는 제목으로 3월 15일 아침 9시에 가평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한다는 내용의 격문을 작성해 북면의 각 지역에 배포하였다. 이를 맡기로 한 정기복(鄭基福)·이만석·정재명 등은 3월 14일 목동리·화악리(華岳里)·소법리 등 북면 내 여러 지역에 격문을 배포하였고, 구두로도 내용을 전달해 주민들의 참여를 독려하였다. 거사 당일인 3월 15일 아침 대형 태극기를 앞세우고, 이윤석·정흥교·장기영·장호리 등과 함께 북면사무소로 이동하였다. 면사무소 앞에는 이미 거사 소식을 접한 많은 주민들이 나와 있었다. 정흥교·장기영·이만석·최종화 등과 함께 태극기를 들고 흔들면서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였고, 많은 주민들이 이를 따라 외치며 호응하였다. 그리고 시위대와 함께 대형 태극기를 앞세우고 대한독립만세를 연창하면서 읍내에 위치한 가평군청으로 이동해 독립선언식을 거행하였다. 이윤석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고, 이규봉이 독립만세 선창하자 시위대 전체가 따라 크게 외쳤다. 이러한 만세시위를 보고 공감한 읍내 주민들이 계속 동참하면서 시위대의 규모는 수백 명으로 확대되었다. 이윤석·정흥교·장기영·장호리 등과 함께 선두에서 시위대를 이끌고, 공립학교와 군내면사무소 등 읍내 곳곳을 행진하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가평헌병분견소 헌병들은 대규모 만세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출동해 시위대의 즉각 해산을 명령하였다. 하지만 이를 거부하고 주민들과 함께 계속 만세시위를 이어나갔다. 대규모 시위대의 위세에 눌린 일제 관헌들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다가 저녁 8시경 시위대가 해산하기 시작하자 출동해 주도자 10여 명을 검거하였다. 이에 분노한 장기영, 장호리 등과 함께 분견소로 쫓아가서 구속자의 석방을 요구하였지만, 일제 헌병들은 전혀 받아들이지 않았다. 구속자 석방에 대한 노력은 다음날로 이어졌다. 장기영의 제안으로 3월 16일 아침 일찍 구속자들의 석방을 위한 모임이 개최되었다. 이 모임에는 전날 체포되지 않은 주도자들과 주민 등을 포함해 약 200여 명이 참여하였다. 장호리와 함께 참석한 후, 분견소로 가서 동지들의 석방을 요구하자는 장기영의 의견에 따라 200여 명과 더불어 읍내의 헌병분견소로 이동하였다. 그러다가 목동리의 당고개[(祭堂峴)]에서 군수와 일제 경찰, 헌병 오장 마쓰모토 긴죠(松本銀藏)가 이끄는 경성헌병분대와 만났다. 일제 헌병대는 즉각 해산을 명령하며 시위대를 향해 총격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장기영과 함께 시위대를 지휘하며 일제 군경에게 대항하였지만, 결국 다른 동지들과 붙잡혀 조사를 받고 송치되었다. 1919년 4월 2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과 소요죄로 징역 1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항소하였으나, 같은 해 7월 14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 다시 상고하였지만, 그해 9월 25일 고등법원에서 최종 기각되었다. 서대문감옥에서 옥고를 겪다가, 1920년 4월 28일 풀려났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한성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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