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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원거

全元擧

1867. 12. 24 ~ 1919. 4.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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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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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 양양(襄陽)3.1운동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강원도 양양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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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1919년 양양군 현북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1867년 12월 24일 강원도 양양군(襄陽郡) 현북면(縣北面) 하광정리(下光丁里)에서 태어났다. 이명으로 한자가 다른 전원거(全元巨)와 전원종(全遠鍾)을 사용하였다. 1919년 4월 9일 양양군 현북면 기사문리(其士門里)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양양군 현북면 기사문리 만세운동은 원일전리(元日田里)에 사는 유학자 박규병(朴奎秉)·박원병(朴元秉) 형제, 상광정리(上光丁里) 남감리교 청년 오세옥(吳世玉)·이응렬(李應烈), 중광정리(中光丁里) 유지 임병익(林秉翼), 한학자 오정현(吳鼎鉉), 포수 김종대(金鐘大), 마을 구장들까지 많은 사람들이 계획에 참여하고 이끈 대규모 만세운동이었다. 이들은 양양면에서 시위를 펼치기로 하고, 장이 서는 4월 9일을 거사일로 정하였다. 박규병과 박용규(朴容圭)는 시위 때 선봉에 세울 대형 태극기 제작을, 박원병은 독립선언서 복사를, 면서기를 지낸 오정현은 연락문서 작성을, 이응렬과 김종대는 연락 책임을, 구장들은 주민 동원과 주민들에게 나누어 줄 태극기 제작을 맡기로 하고, 각각 만세운동 준비에 분주히 움직였다. 만세운동을 준비하던 중 박원병, 박규병 형제가 체포되는 일이 발생했지만, 9일로 예정된 시위는 계획대로 추진되었다. 만세시위를 예정대로 추진할 수 있었던 것은 구장들의 힘이 컸다. 상광정리의 김익렬(金益烈), 중광정리의 김우근(金禹根), 하광정리의 김진혁(金振赫), 대치리(大峙里)의 김종성(金鐘聲), 명지리의 권광식(權廣植) 등 현북면 구장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주민들을 동원했기 때문이다. 하광정리 구장 김진혁으로부터 만세시위가 있을 예정이라는 소식을 듣고 주저 없이 참여하였다. 4월 9일 아침, 김진혁으로부터 받은 태극기를 가슴에 품고 면사무소로 발길을 옮겼다. 면사무소에는 하광정리 주민뿐만 아니라 만세시위를 위해 모인 이웃 마을 주민들까지 1,000여 명이 태극기를 들고 모여 있었다. 면장을 만세시위에 앞세우기 위해 찾았지만, 면장과 직원들은 모두 자취를 감춘 뒤였다. 면사무소 주위를 돌며 만세시위를 펼친 후에 양양면으로 향하였다. 장터로 향하려던 시위대에게 양양면 경비가 삼엄하다는 소식이 들렸고, 이에 주도자들은 시위 장소를 기사문리에 있는 경찰주재소로 변경하였다. 시위대 맨 앞에는 옥양목으로 만든 대형 태극기가 휘날렸으며, 구장들이 선두에 섰다. 구장들 뒤에서 주민들을 이끌고 기사문리로 나아갔다. 주재소로 가는 길에 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주재소 앞 다리에 이르렀을 때 순사 이홍근(李弘根)이 시위대 앞을 막고 진입을 만류하였다. 주재소에는 만세시위에 대비하여 전날 강릉에서 도착한 지원 부대까지 동원하여 대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주재소 옆 개울 언덕에는 무장한 군경들이 시위대를 향하여 총을 겨누고 있었다. 경찰과 한참 대치하다가 주재소로 진입하니, 경찰이 발포를 시작하였다. 선두에 있었기에 미처 총탄을 피하지 못하고 그를 비롯하여 고대선(高大先) 등 다른 8명과 함께 현장에서 사망하였다. 20여 명의 부상자도 발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정상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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