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 독립운동가 목록으로

전재득

全在得

1898. 8. 28 ~ 1968. 12. 30

김판서 캐릭터 이미지

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전재득

김판서는 역사 탐구를 돕는 가상의 AI 문화해설사예요.

추천 질문을 누르거나, 궁금한 내용을 직접 물어보세요.

0/200자
충북 영동(永同)3.1운동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충청북도 영동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지도에서 보기 →

포상 정보

  • · 대통령표창(1995)

관련 사건

  • · 3.1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대통령표창(1995) 1898년 8월 28일 충청북도 영동군(永同郡) 학산면(鶴山面) 서산리(鋤山里)에서 태어났다. 향리에서 농업에 종사했다. 1919년 4월 3일의 서산리 호미실장터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학산면에서는 1919년 3월 29일 최초의 만세시위 이후 4월까지 지속적으로 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 특히 이곳의 만세시위는 일제의 노동력 수탈에 대한 직접적인 불만이 폭발하여 여러 차례 일제의 관공서를 습격하는 격렬한 양상으로 표출되었다. 대표적으로 3월 29일 학산리의 주민 200여 명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일제의 관공서를 공격한 시위가 있었다. 3월 30일에는 이웃한 양산면(陽山面) 가곡리(柯谷里)의 인천이씨(仁川李氏) 가문의 이채연(李彩然)·이관연(李觀然)·이헌주(李憲周)의 주도로 도로 공사에 동원된 양산면과 학산면의 주민들이 연합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4월 3일의 서산리 호미실장터 만세시위는 양봉식(梁鳳植)을 중심으로 준비되었다. 서간도 지역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1919년 2월 귀국한 양봉식은 서울의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귀향한 양봉식으로부터 독립선언서와 함께 서울의 만세운동 상황을 자세히 전달받는 동시에, 학산면에서 만세운동을 함께 일으키자는 제안을 받았다. 이에 적극적으로 동의하여 이기영(李璣榮)·이건양(李建陽)·정해용(鄭海容)·전만표(全萬杓) 등과 함께 거사일을 호미실장터 장날인 4월 3일로 결정했다. 4월 3일 오후 4시경 양봉식·이기영 등과 함께 면소재지인 서산리의 호미실장터로 나갔다. 장터 한복판에서 양봉식을 중심으로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고, 장터에 나온 주민들에게 태극기를 배포하면서 만세시위에 동참할 것을 호소하였다. 만세시위에 공감한 300여 명의 주민들을 지휘하여 태극기를 흔들면서 장터의 곳곳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후 시위대를 이끌고 면사무소 앞으로 가서 시위를 계속하였다. 면사무소 앞에서 양봉식은 “바야흐로 지금은 주민이 조밥을 먹기도 힘든 때에 비싼 뽕나무 묘목을 강제 배부하려는 것은 옳지 못한 처사이니 이것을 처분하자”고 외쳤다. 이에 시위대가 환호하며 적극적으로 동의하였고, 이들을 인솔하여 면사무소 구내에 임시로 심어 놓은 뽕나무 묘목 약 2만 8천 그루를 뽑아 대부분을 소각하였다. 이후 시위대의 선두에서 주재소를 향해 돌을 던져 유리창을 부수고, 사무실 및 숙직실의 집기, 비품을 모두 파괴하는 격렬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날의 만세시위로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1920년 11월 22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5월을 받았다. 판결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1921년 1월 17일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한성민⋮

국어사전

국어사전

원문에서 어려운 낱말을 선택하거나 직접 검색해 보세요.

낱말을 검색하면 뜻풀이가 여기에 표시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