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구용
鄭九鎔1880. 10. 5 ~ 1941. 5. 5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2002)
관련 사건
- · 제주 법정사 항일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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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2002) 1880년 (음)10월 5일 경상북도 영일군(迎日郡) 동해면(東海面) 대동배동(大冬背洞)에서 아버지 정극서(鄭克瑞)와 어머니 이여형(李汝馨)의 2남 가운데 둘째로 태어났다. 본관은 연일(延日)이며, 이명으로 한자를 달리 한 정구용(鄭龜龍)을 썼다. 한의사로 활동하였다. 1918년 일제강점기 제주(濟州)에서 일어났던 법정사 항일운동 당시 격문을 작성하였고, 김연일 등과 함께 거사를 계획·지도하였다. 승려 김연일(金蓮日)의 영향을 받아 함께 수행하던 강민수(姜閔洙)·김인수(金仁秀)·김용충(金用忠) 등과 함께 민족의식을 키웠다. 이때 제주 출신으로 기림사에서 출가하여 수행하고 있던 방동화(房東華)의 제의로 제주로 이주한 후 구체적인 독립운동 방안을 실행하고자 계획하였다. 제주로 이주한 시기는 1913~1914년 무렵으로 김연일·김인수·김용충 등과 함께 관음사를 거쳐 좌면(左面)에 위치한 법정사(法井寺)에 머물렀다. 법정사는 1909년 제주에서 의병항쟁을 주도한 김석윤(金錫允)을 비롯한 항일의식을 가진 사람들이 교류하며 독립운동을 모색하던 곳으로 신도들에게 일제의 국권침탈의 부당성과 한국독립의 당위성을 설파하며 항일의식을 심어주었다. 1918년 4월 무렵부터 법정사 주지 김연일 등과 더불어 항일운동의 의지를 결집하고 거사를 위한 구체적인 준비를 시작하였다. 이어서 사찰을 드나들던 사람들에게 거사의 뜻을 밝히고 참여를 권유하였다. 그리고 제주도 내의 일본인 관리를 처단하고 일본인을 제주도에서 쫓아내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무장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1918년 9월 중순 법정사에서 김연일이 ‘불무황제(佛務皇帝)’로 즉위식을 가지고 거사를 위한 조직을 결성하였다. 조직은 의병전쟁에 참여했던 김석윤의 영향으로 한말 의병부대와 같이 좌대장·우대장·선봉대장·중군대장·후군대장 등을 두었고, 깃발·곤봉·총기 등을 준비하였다. 이때 격문 작성 임무를 맡았다. 격문은 일제 침략의 부당성과 침략으로 인한 한국의 참상을 알리고 국권회복의 당위성과 제주에서 일제 관리와 일본인을 축출하며, 아울러 거사 실행을 위해 각 면과 이장에게 마을의 장정을 모아 집결한 후 거사를 일으켜 일제 관리를 체포하고 일본인들을 축출한다는 내용이었다. 이후 격문을 제작해 서귀포 일대에 배포하는 등 김연일과 함께 거사를 계획하고 기세를 진작시키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10월 7일 새벽 지도부는 법정사 법회에 참석한 사람들과 더불어 성사기원 기도를 올리는 출정식을 갖고 법정사를 출발하였다. 이때 선봉대장 강창규와 모사 박주석을 도와 사람들을 모집해 참여시키는 역할을 담당하면서 사태 추이를 살펴 서로 의논해 거사의 방향을 결정하였다. 선봉대 30여 명은 큰 깃발 여섯 개를 앞세우고 화승총과 몽둥이를 가지고 절을 내려가 마을에서 참여자 모집에 나섰다. 이들은 먼저 도순리 위쪽 상동에서 주민들에게 참여를 권유하였고, 이어 영남리에서 구장에게 민적부를 받아 장정 20여 명을 참여시켰다. 또한 서호리와 호근리에서도 민적부를 바탕으로 장정을 모집하였으나, 기대에 미치지는 못하였다. 서귀포를 공격하기로 했던 계획에 비해 병력이 부족하자, 계획을 변경해 좌면 중문리 경찰관주재소를 습격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남쪽 연안으로 이동하면서 동면 강정리·도순리·하원리에서 주민의 가입을 독려하여 참여자가 300~400여 명에 이르렀다. 동면 강정리·도순리의 큰 하천의 서안 부근에서는 일제 경찰의 연락을 차단하기 위해 전선과 전주 2개를 절단하고, 일본인과 동행하던 한국인을 공격하였다. 항일봉기대가 하원리를 거쳐 중문리에 이르렀을 때 참여자가 증가하여 모두 700여 명에 이르렀다. 봉기대는 중문에서 경찰관주재소를 공격하여 안에 있던 비품과 문서 등을 불태우고 주재소 건물을 방화하였다. 그러나 오전 11시 무렵 서귀포 경찰관주재소 기마순사대가 공격해오자 참여자들과 함께 해산하였다. 이 일로 1919년 2월 4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 궐석재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과 소요죄로 징역 3년을 받았다. 1923년 2월 13일 자택에서 붙잡힌 후, 1심 판결에 불복하고 항소하였다. 그해 6월 29일 대구복심법원에서 다시 징역 1년 6월을 받고 대구감옥에서 옥고를 겪었다. 그러다가 1년 1월 15일로 감형되어 1924년 8월 13일 풀려났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2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허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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