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인명사전 - 한국독립운동정보시스템
1893. 12. 25 ~ 1938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나자거우사관학교
- · 한인사회당
- · 한인사회당 적위군
- · 대한국민의회
- · 적유의용단
- · 조선공산당
- · 간민교육연구회
- · 신간회
포상 정보
- · 독립장(2007)
관련 사건
- · 한인사회당 조직
- · 러시아 내전
- · 연해주 일본 군대에 선전문 배포
- · 적유의용단의 탈옥 사건
- · 제3차 조선공산당(ML당) 사건
- · 신간회 복대표대회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독립장(2007) 1893년 12월 25일 함경북도 길주군(吉州郡) 덕산면(德山面)에서 태어났다. 향리에서 서당과 공립농민학교(公立農民學校), 사립사범학교(私立師範學校) 등에서 면학하였다. 1907년 기독교에 입교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북간도 국자가(局子街) 소영자(小營子)로 이주하여 기독길동학당에서 약 1년간 수학하였다. 1911년부터 국자가로부터 5km에 위치한 광성학교(光成學校)에서 교편을 잡고 배일사상의 고취에 노력하였다. 여기에서 광성학교의 교장 이동휘(李東輝)와 관계를 가지고 이후 활동을 같이 하였다. 1913년 광성학교 교사 장기영(張基永)이 대장으로 학생들을 중심으로 조직한 단지혈맹결사대의 비서감 겸 재무로 활동하였다. 간민회(墾民會)에 참가하여 활동하였으며, 1914년 4월 이동휘를 비롯한 김립, 오영선 등이 항일 무장 투쟁을 위해 광성학교의 일부 학생들을 거느리고 와서 왕칭(汪淸)현 나자거우(羅子溝) 태평촌(太平村)에 설립한 나자거우사관학교(東林學校·大甸學校)의 교사로 활동하였다. 나자거우사관학교가 문을 닫은 후 1915년 일제 당국의 탄압을 피해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로 옮겨가 니콜스크-우수리스크, 중국령 둥닝(東寧)현 등지에서 거주하며 기독교 전도사, 신문 기자 등이 되어 배일사상 고취에 애썼다. 1918년 3월 하바롭스크에서 개최된 한인 정치 망명자 회의에 참가하였다. 대회는 “볼세비키주의에 찬동하여 고려 혁명을 그 길로 촉진시키자”는 이동휘의 제안을 둘러싸고 두 그룹으로 분화되었다. 이동녕 등 이동휘의 제안에 반대하는 이들은 순수한 독립운동만을 위해 ‘광의단(光義團)’이라는 무장 단체를 조직하되, 원동 소비에트 정부로부터는 후원만을 얻자는 의견을 개진하였다. 결국 대회는 결렬되었다. 이동휘의 제안을 지지했던 김 알렉산드라·박애·유동열·김립 등과 함께 한인사회당을 발기하였다. 1918년 5월 11일 하바롭스크에서 창립된 최초의 한인 사회주의 정당인 한인사회당에 참가하여 선전부원이 되었다. 6월 말 한인사회당 군사부장이자 사관학교 교장인 유동렬과 함께 한인 청년 100여 명으로 한인사회당 적위군을 조직하여 지휘하였다. 6월 29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체코군의 봉기가 일어나 연해주 일대를 백군이 점령한 후, 우수리 카자크 아타만(지역 군정 장관) 칼미코프가 일본군의 원조를 받아 북진하여 하바롭스크를 공격하자, 유동렬과 함께 한인사회당 적위군을 이끌고 원동 소비에트 정부의 요청에 따라 방어전에 참가했다. 뱌셈스크와 크라스나야 레츠카(Красная речка) 전투에서 백군에 맞서 격렬히 싸웠으나 패배하고 한인사회당 적위군 절반 이상이 전사하였다. 하바롭스크가 백군에 점령되자 아무르강을 따라 블라고베시첸스크로 퇴각하던 도중 백군에 체포되었다가 김 알렉산드라가 마련해 준 중국 여권을 이용해 중국인으로 가장하여 김립·이인섭·유동렬 등과 함께 탈출에 성공하였다. 김 알렉산드라는 9월 16일 하바롭스크에서 처형당하였다.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온 후 1919년 2월 25일 전로한족회 중앙 총회를 중심으로 러시아령과 간도 및 국내 대표들이 참여하여 니콜스크-우수리스크에서 개최된 ‘전로국내조선인대회(全露國內朝鮮人大會)’에 참가하였다. 대회에서 조직된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의 내무부원으로 국민의회의 결사대 모집, 양성 운동에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3월 17일 국내의 3·1운동에 영향을 받아 연해주 전역에서 벌어진 만세운동을 조직하고 지도하였다. 8월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서 발행된 『한인신보(韓人新報)』의 총무 및 기자로 활동하며 한인들에게 독립사상을 고취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1919년 7월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서 장도정·김진·최성우·한용헌 등과 함께 일세당(一世黨)을 결성하였다. 1920년 1월 31일 연해주에서 정변이 일어나 블라디보스토크 백파 정권이 무너지고 중간파와 혁명파의 연립 정부가 수립되었다. 이에 일세당은 이름을 한인사회당으로 바꾸었는데, 1920년 3월 14일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의 슬라브 정교 사원에서 개최된 한인사회당 총회에서 중앙위원 겸 선전부장으로 선출되었다. 한편 2월 14일 대한국민의회가 재건될 때 참가하여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니콜스크-우수리스크의 적군 총사령관 안드레예프와 연락하여 연해주에 출병한 일본군 및 한국 내지와 일본에 있는 일본 군대에 항일 사상과 사회주의를 선전하는 활동을 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선전문 5만 장을 인쇄하여 배포하다가 일본군 헌병에게 붙잡혔다. 국내로 압송되어 함흥지방법원 청진지청에서 징역 5년을 받았다. 청진형무소에 재감 중 동지 14명과 함께 비밀 결사 적유의용단(赤油義勇團)을 조직하였다. 1923년 8월 최용익·신대용·신예균 등 적유의용단원들과 함께 파옥(破獄), 도주를 결행하였다. 파옥, 도주 중 일본 간수들의 칼에 맞아 부상을 당하고 다시 붙잡혔다. 이로 인해 함흥지방법원 청진지청에서 이른바 도주·상해·불법 감금·공무 집행 방해 등의 혐의로 징역 4년을 받았다. 두 차례에 걸쳐 감형을 받아 1927년 9월 16일 8년 만에 출옥하였다. 출옥 후 12월 서울에서 김세연(金世淵)의 권유로 제3차 조선공산당(ML당)에 가입하였다. 북간도로 가서 조선공산당의 세력을 확장하기 위하여 지부를 설치하는 활동을 하였다. 또한 간민교육연구회(墾民敎育硏究會) 부회장이 되어 고려혁명당과 중국 국민당의 연계를 기도하였다. 1928년 4월 강현철, 윤철순 등 6명과 함께 용정(龍井)의 일본 영사관 경찰서에 붙잡혀서 치안 방해라는 명목으로 3년간 재류 금지 처분을 받고 본적지인 길주로 송환되었다. 다시 북간도로 가서 활동하다가 9월 11일 재류 금지 위반으로 체포되어 징역 1월을 받고 복역한 후 또다시 길주로 송환되었다. 1929년 6월 신간회 복대표대회(複代表大會)에서 중앙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7월 본정(本町)경찰서에 체포되어 조사를 받고 11월 29일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징역 5년을 받았다. 1930년 2월 25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징역 5년이 확정되어 복역하다 1934년 9월 30일 출옥하였다. 출옥 후 소련으로 건너갔다. 소련으로 건너간 후 하바롭스크에서 주직업 동맹 인쇄소 교정원으로 근무하였다. 1937년 3월 18일 내무 인민 위원부НКВД 국가 보안부에 붙잡혀서 1938년 4월 15일 원동 변강 내무 인민 위원 부 3인 위원회(트로이카)의 결정으로 최고형을 받았다. 5월 11일 하바롭스크에서 총살당하였다. 1957년 3월 13일자 원동 군관구 군사 재판소의 결정으로 혐의 사실 부재로 본 사건은 폐기되었으며 복권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윤상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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