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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득

金奇得

1899. 11. 9 ~ 1933. 4.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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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김기득

김판서는 역사 탐구를 돕는 가상의 AI 문화해설사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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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열투쟁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서울특별시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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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단체

  • · 의열단
  • · 신간회 오사카지회
  • · 조선공산당재준비조직위원회

포상 정보

  • · 애국장(1991)

관련 사건

  • · 밀양폭탄사건
  • · 후계공산당사건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1991) 1899년 11월 9일 서울에서 상민(常民) 김창엽(金昌燁)의 3남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출생지 겸 원적이 종로구 청진동(淸進洞), 출생지가 중구 수표동(水標洞), 본적이 종로구 사직동(社稷洞), 혹은 수표정 혹은 종로구 필운동(弼雲洞) 등 자료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중구 서소문정(西小門町)의 정동(貞洞)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양정(養正)고등보통학교로 진학하였으나 1년을 다니다 그만두고, 용산철도학교(龍山鐵道學校)에 들어가 1년간 수학하였다. 그 후 17세부터 20세까지(1915~1918년으로 추정) 부산 초량동(草梁洞)에 거주하며 부산역 전신계(電信係) 직원으로 일하였고, 1918년 9월부터는 철도국 고원(雇員)이 되었다. 1919년 3월 23일 밤, 서울 시내 20여 곳에서 벌어진 독립 만세 시위 중 종로 3정목(3町目, 현 종로 3가) 시위에 가담한 혐의로 붙잡혀 기소되었다. 같은 해 5월 경성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개월 형이 선고되었으나, 항소하여 7월에 무죄 판결을 받았다. 얼마 후 중국으로 망명하여 상하이(上海)와 지린(吉林) 방면으로 다니며 본격적인 독립운동의 길로 들어섰다. 그러다 1919년 11월 지린에서 조직된 항일 비밀결사 의열단(義烈團)의 단장 김원봉(金元鳳)이 폭탄을 구입하려고 상하이에 가 있을 때인 1920년 3월에 그를 만나 의열단에 가입하였다. 의열단은 창단 직후 조선총독부·동양척식회사(東洋拓植會社)·매일신보사(每日申報社)·경기도경찰부 등 국내 주요 일제기관 폭파와 요인 암살의 특공거사를 감행키로 결의하였다. 이 계획의 실행을 위해 김원봉과 부단장 곽재기(郭在驥) 및 선임단원 이성우(李成宇)가 1920년 3월 상하이에서 폭열탄(爆裂彈) 3개 제조용 폭약과 탄피 등을 한 중국인에게서 구입하였다. 그것을 갖고 프랑스 조계 보창로(寶昌路) 보강리(寶康里) 김대지(金大地)의 집에서 폭탄을 만들 때 동참하였다. 이때쯤 위 3인 및 창립단원 강세우(姜世宇)와 함께 찍은 사진이 전해지고 있다. 그 직후 안둥(安東)으로 가서 그곳의 연락 기관인 이낙준(李洛俊)의 거소에서 황상규(黃尙奎)·곽재기·이성우·윤소룡(尹小龍) 등과 함께 폭탄의 국내 밀반입 방책과 국내 상황 조사 및 자금 변통에 관해 의논하였다. 폭탄 추가 구매를 위해 다시 상하이로 갔다가 2차분 폭탄 13개가 구입된 4월에 폭탄의 국내 밀반입 협력과 투탄 실행 참가를 김원봉으로부터 명령받고 해로로 안둥에 갔다. 그러나 이병철(李丙喆)에 의해 반입이 이미 완료되어 있어서 서울 사직동의 본가로 돌아와서 기회를 엿보며 대기하다가, 폭탄 거사 때 뿌릴 격문 인쇄비만 조달되면 여러 동지와 함께 투탄 행동에 나서려고 하였다. 6월 중순에 김원봉의 조속 결행 지시를 전하러 입경한 이낙준을 곽재기·황상규·이성우 등과 함께 서대문정 정태준(鄭泰駿)의 집에서 만났고, 그 자리에서 협의된 대로 부산으로 가서 2차분 폭탄 13개의 보관책임자인 이일몽(李一夢, 일명 李壽澤)을 만나 김원봉의 지시를 전하고 폭탄도 서울로 가져오도록 하였다. 이일몽이 수일 내로 폭탄을 갖고 서울로 가겠다고 하므로 그대로 귀경하던 길에 이미 첩보를 입수하여 대대적인 검거망을 가동시키고 있던 일제 경찰에 남대문역(현 서울역)에서 붙잡혔다. 일제에 체포된 후 8개월여 동안 혹독한 고문이 수반된 경찰 조사와 검사국 예심을 거쳐 재판에 회부되었고, 1921년 6월 21일 '폭발물취체규칙'과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 위반 죄목으로 징역 7년 형을 선고받았다. 마포의 경성감옥에서 복역하다 일부 감형으로 1926년 4월 24일 출옥하여, 영화사 극동키네마(キネマ)에서 일하였다. 그러다 일본 오사카(大阪)로 건너갔고, 1927년 12월 신간회(新幹會) 오사카지회 설립대회 때 서기장으로 선임되었으며, 1928년 1월에는 10인 대표위원 중 1인이 되었다. 그 후 귀국하여, '12월 테제'의 권고를 좇아 1929년 모스크바로부터 밀입국한 김단야(金丹冶)의 주도로 노동자·농민층 위주의 조선공산당 조직 재건을 비밀리에 추진한 '조선공산당재조직 준비위원회'에 가담하였다가 1930년 종로경찰서에 붙잡혔다. 1930년 4월 치안유지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김철수(金錣洙)·권오직(權五稷)·한빈(韓斌) 등 22명과 함께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으로 송치되었고, 1931년 5월 예심이 종결되고 재판에 회부되어 동년 10월 2년 징역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겪었다. 1933년 2월 2일 만기 출옥하였는데, 옥중에서 얻은 병으로 같은 해 4월 6일 새벽 사직동 자택에서 사망하여 동지장(同志葬)으로 장례가 치러졌다. 단 4월 5일 밤에 사망하였다는 의견이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김영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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