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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두량

張斗良

1895. 1. 2 ~ 1954.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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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장두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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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북 부령(富寧)만주방면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함경북도 부령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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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단체

  • · 대한국민회

포상 정보

  • · 독립장(1993)

관련 사건

  • · 1919년 청진부 신암동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독립장(1993) 1895년 1월 2일 함경북도 부령군(富寧郡) 청암면(靑岩面) 자작동(自作洞)에서 태어났다. 이명은 장기양(張基羕)이다. 천도교인(天道敎人)이다. 가족으로는 할아버지 장한렬(張韓烈), 할머니 석씨(石氏), 아버지 장려형(張礪炯), 어머니 황말음(黃末蔭), 부인 김정렬(金貞烈), 아들 장경룡(張庚龍), 며느리 김성녀(金姓女), 손자 장동섭(張東燮) 등이 있었다. 9세부터 13세까지 서당에서 한문을 배웠다. 이후 사립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2년간 농업에 종사하였고, 1년간 면서기(面書記)로도 근무하였다. 22세 때 서울 보성중학교(普城中學校)에 입학하여 2년간 수학하였다. 이후 결혼하여 고향에서 상업에 종사하였다. 1919년 함북 청진부(淸津府)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윤병후(尹炳厚)·장채남(張彩男)·서성칠(徐星七)·윤학송(尹學松)과 함께 독립선언서 인쇄, 거사 일자, 거사 방법 등을 협의하였다. 같은 해 3월 22일 밤 부령군(富寧郡) 청암면(靑巖面) 직하동(稷下洞) 방낙선(方洛先)의 집에서 독립선언서 약 1,000장을 인쇄하고, 태극기 100개를 제작하였다. 3월 31일에는 동지들과 함께 윤병후의 집에 모여 신암동(新岩洞)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만세시위가 시작되자 일제는 시위대를 해산시키고 주도 인물들을 체포하였으나, 이때 붙잡히지 않고, 간도(間島)로 이주하였다. 1920년 3월부터 중국 지린성(吉林省) 허룽현(和龍縣)에서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 제1남지방회(第1南地方會) 경호부(警護部) 부원으로 활동하였다. 국민회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직후 조선독립기성회(朝鮮獨立期成會)를 개편한 단체로 1919년 간도에서의 독립선언과 만세운동을 주도한 조선국민의사회(朝鮮國民議事會)가 전신이다. 의사부는 독립축하식 직후 조선독립기성회로 명칭을 바꾸었다.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임시정부가 수립되고 임시헌법이 발표되자 조선독립기성회라는 명칭이 국호(國號)에 저촉된다고 하여 각 지방 단체 대표자들이 회의를 개최하고 국민회로 개칭하였다. 국민회는 임시정부의 승인을 얻어 군사와 재정 등 제반 독립사무를 집행하여 북간도(北間島) 통일기관임을 자임하였다. 1920년 (음)4월 장남섭(張南燮) 외 2명과 함께 함북 회령군(會寧郡) 운두면(雲頭面) 성북동(城北洞) 김기현(金基鉉)의 집에서 오규묵(吳圭黙)·김동희(金東禧)·이서운(李瑞雲)·김용수(金鎔洙)·장기하(張基河) 외 4명에게 독립운동자금을 요청하고 김용수·오규묵 외 1명으로부터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그리고 같은 지역 김진익(金鎭翼)의 집에서 장규형(張奎炯)·이영기(李榮基)·오상업(吳相業)·장익형(張翼炯)·윤기훈(尹基勳)·윤형권(尹衡權)·장두형(張斗炯)·윤풍현(尹豊鉉)에게 독립운동자금을 요청하고 김진익·장규형으로부터 자금을 모집하였다. 이어서 4월 4일부터 4월 13일까지는 허룽현 사백사(四白社)에서 장기하·이영기·오상업·손익형·윤기훈·장두형·윤풍현으로부터, 회령군 운두면 유선동(遊仙洞)에서 윤형권으로부터 각각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였다. 같은 해 6월에는 함북 무산군(茂山郡)에 거주하는 강치근(康致根)에게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였다. (음)7월 경에는 국민회 제1남지방회 경호부 제3대장(第)3(隊長) 이명언(李明彦) 외 동지들과 함께 부령군 청암면 직하동에서 방낙선에게 독립운동자금을 요청하였다. 같은 달에 이명언·장남섭(張南燮)과 함께 부령군 청암면 황재룡(黃在龍)의 집에서 강인백(姜仁伯)·황학천(黃鶴天)·김병철(金炳喆)·석주국(石柱國)에게 독립운동자금을 요청하였다. 또한 이명언·장남섭과 함께 국민회 제1남지방회장 명의로 작성된 독립운동자금을 의연(義捐)하라는 문서를 지참하고 청진부(淸津府) 신암동으로 이동하여 김병륜(金秉倫) 외 2명으로부터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였다. 그리고 그해 7월 21일에는 함북 경성군(鏡城郡) 용성면(龍城面) 강덕동(康德洞) 차모(車某)의 집에서 독립운동자금을 요청하였다. 1920년 (음)8월까지 동지들과 협력하여 허룽현 칠도구(七道溝)와 사백사에 국민회 지회를 설치하였다. 칠도구에는 칠동지회(七東支會)와 칠서지회(七西支會)를, 사백사에는 대소지회(大蘇支會)와 백운지회(白雲支會)를 설치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8월 이명언·이민준(李民俊)·장남섭 등과 함께 허룽현 사백사 소소동(小蘇洞) 국민회 모연대원(募捐隊員) 박을팽(朴乙彭)의 집에서 밀정 처단을 협의하였다. 이후 밀정 김응학(金應學)을 소소동 인근 호혈산(虎穴山)으로 연행하여 처단하였다. 9월 4일에는 경성군 용성면 회암동(回岩洞)에서 이명언과 함께 차용관(車用觀)으로부터 독립운동자금 249원을 모집하여 국민회 제1남지방회에 송부하였다. 이들이 모집한 독립운동자금은 총 2,000여 원과 3,300루블에 달하였다. 이러한 활동을 펼치다가 장남섭·이민준·이명언과 함께 회령경찰서(會寧警察署) 일제 경찰에게 붙잡혔다. 1921년 1월 30일 검사국에 송치되었다. 같은 해 9월 30일 함흥지방법원 청진지청에서 이른바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 위반, 살인죄·강도죄로 무기징역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항소해 서대문형무소로 압송되었다. 같은 해 11월 26일 경성복심법원에서 무기징역이 확정되었다.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겪다가, 그해 12월 28일 경성형무소로 이감되었다. 1922년 3월 6일 경성형무소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였고, 같은 해 7월 11일에는 형무소 내 작업을 거부하는 등 옥중투쟁을 전개하였다. 1924년 징역 20년으로, 1927년 징역 15년으로, 1928년 징역 11년 3월로 감형되었다. 1931년 8월 7일 가출옥이 허가되었고, 다음날인 8일 오전 11시 경성형무소에서 풀려났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최병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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