崔寬用
崔寬用1899. 5. 1 ~ 1945. 7. 5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대한독립군
- · 고려혁명군
- · 한국독립군
- · 대한국군총사령부
포상 정보
- · 독립장(1963)
관련 사건
- · 봉오동전투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독립장(1963) 1899년 5월 1일 황해도 연백군(延白郡) 도촌면(道村面) 기산리(基山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만세운동 직후 만주로 건너가 홍범도(洪範圖)가 이끄는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에 가입하였으며, 제1대대 제3중대 특무정교(特務正校)로 활동하던 중 봉오동(鳳梧洞)전투에 참가하였다. 청산리전투 이후 1921년 1월에는 러시아 이르쿠츠크 고려혁명군관학교(高麗革命軍官學校)에 입학하여 군사학을 공부하였다. 고려혁명군관학교는 1921년 러시아 혁명군과 함께 백계(白系) 러시아군을 소탕한다는 협정 하에 혁명군의 지원을 받아 독립군 간부 양성을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교장은 지청천(池靑天)이었으며, 이계(李繼)·채영(蔡英)·최진동(崔振東)·조성환(曺成煥)·강국모(姜國模)·홍범도·안무(安武)·김규식(金奎植)·김경천(金慶天) 등이 주축이 되어 운영되었다. 자유시참변(自由市慘變) 이후 만주로 돌아왔다. 1923년 5월 옌지현(延吉縣) 밍위에거우(明月溝)에서 노병회(老兵會)의 후원으로 조직된 고려혁명군(高麗革命軍)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고려혁명군은 만주로 돌아온 독립운동세력이 둔경제(屯耕制)에 바탕을 둔 병농일치제(兵農一致制)을 통해 장기항전을 모색하며 건립한 군사조직이었다. 주요 인물로는 총사령 김규식, 참모장 고평(高平), 부관장(副官長) 최해(崔海), 기병사령(騎兵司令) 이범석(李範奭), 사장(師長) 최준형(崔俊亨), 헌병대장 허승완(許承完), 경무관(警務官) 허통(許通) 등이었다. 같은 해 6월 상하이(上海)에서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가 진행되었고, 이에 대해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절대 유지되어야 함을 강력하게 역설하는 「재만유지경고서」 발표에 동참하였다. 선언서에는 이범윤·조성환·김규식·최홍기·이범석·박무건·최세진·현천목·김혁·오상세·계화·양규열·김좌진(金佐鎭) 외 다수의 독립운동 지도자들이 서명하였다. 1925년 1월 정의부(正義府)가 조직되자 별동대장으로 활동하였다. 1930년 7월 지린성(吉林省) 중동선(中東線) 빈현(賓縣)에 거주하며, 북만지역 민족진영의 독립운동단체인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이 결성되자 남대관(南大觀)과 함께 참여하였다. 한국독립당은 한족총연합회(韓族總聯合會)의 김좌진이 한인공산주의자 청년에게 암살당한 후 민족진영과 공산진영의 갈등이 격화되자 홍진(洪震)·지청천·신숙(申肅)·최호(崔灝)·안훈(安勳) 등이 이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결성되었으며, 산하에 한국독립군(韓國獨立軍)을 두고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1931년 9월 18일 만주사변이 일어나고 지청천을 총사령으로 하는 한국독립군의 항일무장투쟁이 본격화되자 이에 참가하였다. 1931년 12월 11일 지청천이 중국호로군연합군총부(中國護路軍聯合軍總部)의 정초(丁初)·양문휘(楊文揮)·고봉림(考鳳林) 등을 만나 한중연합작전에 관한 협정을 체결하는 과정에 최악(崔岳)·오광선(吳光善)·심만호(沈萬浩)·김청농(金靑濃)·최종원(崔鐘元)·한무빈(韓武賓)과 함께 참여하여 협정을 성공적으로 이끄는데 기여하였다. 당시 양측은 최악의 경우에 이르는 한이 있어도 장기항전에 임할 것, 전시(戰時) 후방교련은 한국독립군의 장교가 담당하고 한국독립군의 소요일체(所要一切)는 중국군이 보급할 것 등에 합의하였다. 이로써 한국독립군은 한·중 연대에 근거한 강력한 항일투쟁을 전개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였다. 이후 한국독립군은 1932년 9월 19일의 쌍성(雙城)전투, 1933년 경박호(鏡泊湖)전투, 1933년 4월 15일의 사도하자(四道河子)전투, 6월 7일의 동경성(東京城)전투, 6월 30일의 대전자령(大甸子領)전투, 9월 6일의 동녕현성(東寧縣城)전투 등에서 일제에게 커다란 타격을 입히는 전과를 올렸다. 1932년 5월 한국독립군이 길림자위군중로연합군(吉林自衛軍中路聯合軍) 제3군 독립영(獨立營)으로 개편될 때, 참모 신숙(申肅), 대대장 오광선, 중대장 최악·안해강(安海崗)과 함께 중대장에 임명되어 전투에 참여하였다. 한편 1933년 7월경 한국독립군은 대전자령전투 이후 전리품 배분 문제와 이념문제 등으로 중국군대와 갈등을 빚는 어려운 상황 속에 임시정부의 김구(金九)로부터 뤄양군관학교(洛陽軍官學校) 한인특별반 운영에 참여해 줄 것을 요청받았다. 한국독립당 군사부 참모로 상하이에 파견되어 있던 이규채(李圭彩)로부터 주요 간부들의 이동 필요 자금이 도착하자 10월 20일 경 홍진·지청천·조경한·오광선·공진원·김창환 등 주요 간부, 군관학교 입학지원자 40여 명과 함께 베이징(北京)을 거쳐 중국 관내로 들어와 임시정부에 합류하였다. 이후 임시정부 요인들과 함께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45년 광복 이후 귀국하여 그해 10월 29일 이후 대한국군준비위원회에서 사령부의 군수부장으로 활동하였다. 대한국군준비위원회는 국내로 돌아온 오광선의 주도로 출옥동지회·국군준비대·국민회·건국청년단 등 7개 단체가 통합하여 결성되었으며, 별도 기구로 대한국군총사령부를 두어 임시정부와 연결된 군사조직 건립에 박차를 가하였다. 이후 이 조직은 충칭(重慶)에 있던 광복군총사령 지청천의 허락을 받아 광복군 국내지대로 명칭을 변경하는 한편, 서울·대구·광주·부산·개성·인천 등지에 1개 대대씩의 지대를 편성하고 군사훈련을 실시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 계획은 미군정(美軍政)이 사설군사단체의 해산을 지시함으로써 좌절되어 1946년 3월 1일 해산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황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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