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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惠鍊

惠鍊

1884. 4. 21 ~ 1969. 4.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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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李惠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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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남 강서(江西)미주방면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평안남도 강서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지도에서 보기 →

관련 단체

  • · 샌프란시스코 한인친목회
  • · 대한부인친애회
  • · 대한여자애국단
  • · 대한인국민회
  • · 흥사단

포상 정보

  • · 애족장(2008)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2008) 1884년 4월 21일 평안남도 강서군(江西郡) 보림면(普林面) 화학리(和鶴里)에서 서당 훈장인 이석관(李錫觀)의 2남 2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본관은 안성(安城)이다. 이명은 안혜련·헬렌 안(Helen Ahn)·이혜련(李慧鍊)이다. 8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고모할머니 슬하에서 자랐다. 1897년 안창호의 누이인 안신호와 서울의 연동여학교정신여학교 전신에 입학하였다. 1902년 9월 3일 밀러 목사의 주례로 제중원에서 안창호와 혼인식을 치루고 미국으로 출발하였다. 10월 14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여 한국에서 선교사로 활동했던 드류(A. Damer Drew), 유대모 박사의 집에 집사로 취업하였다. 1903년 샌프란시스코 한인친목회를 결성해 북미에서 첫 한인 커뮤니티를 만들었다. 안창호가 샌프란시스코에서 노동주선소를 운영하는 동안, 리버사이드로 이주해 한인노동자들과 파차파 캠프(Pachappa Camp)를 세우고 한인공동체를 일구었다. 1905년 샌프란시스코에서 공립협회가 결성되기 일주일 전인 3월 29일 맏아들 필립을 낳았다. 1907년 1월 초순 리버사이드에서 결성된 대한신민회의 전권위원으로 임명된 안창호가 한국으로 떠날 때 “당신은 애국자요 영걸의 인물로서 국가에 속한 사람이니,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일할 수 있는 대로 마음 놓고 활동하시오”라고 격려하였다. 1912년 7월 5일 둘째 아들 필선이 태어났다. 미국병원에서 조리사로 일하고 백인가정의 빨래를 해 주며 가족의 생계를 책임졌다. 1913년 5월 13일 흥사단이 조직되자 가입하였고 흥사단소에서 가족과 함께 살았다. 흥사단의 공무와 가족생활이 한 공간에서 이루어져, 단원들 뒷바라지가 일상이었다. 미국을 방문하는 한국인들은 으레 흥사단소를 찾았으며 중요한 한인행사의 모임이 흥사단소에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아 한인 커뮤니티의 센터 역할을 하였다. 일요일이면 예배를 마친 이들이 그의 집으로 몰려왔기에, 접대를 위해 백인가정에서 청소·세탁·바느질·요리 등을 하며 돈을 벌었다. 1919년 만세운동 발발 소식이 전해지자 LA 대한부인친애회 소속으로 독립의연금 모금에 솔선수범하였다. 1919년 8월 5일 다뉴바에서 대한여자애국단이 출범했고, LA 대한부인친애회가 대한여자애국단으로 통합된 후에는 LA지부에서 활동하였다. 대한여자애국단원들은 매월 애국금으로 3달러를 기꺼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내놓았다. 그리고 국민의무금, 21예납금(二十一例納金), 국민회 보조금, 특별의연금 등에 의연하였고, 미국 적십자사 LA지부의 회원으로도 활동하였다. 1925년 3월 26일 차경신이 혼인할 때 신부를 데리고 입장하는 등 재미한인여성들의 대모 노릇도 하였다. 1927년 막내 필영을 출산한 이후에 절약생활을 하며 안창호의 독립운동을 지원하였다.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거 날 안창호가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되어 서대문감옥에 투옥되었다. 이에 막내 필영을 동반하여 안창호의 옥바라지를 하고자 했으나, 안창호의 만류로 귀국을 단념함으로써 남편과의 재회가 무산되었다. 1937년 8월 27일 흥사단본부에서 열린 대한여자애국단 특별집회에서 수전위원(收錢委員)으로 선출되었다. 중일전쟁 재난민과 부상병들을 돕기 위해 약품과 붕대 등을 모집하였으며, 중국 재난민 구제통을 한인 상점에 배치하고 거스름돈을 모아 구제 활동에 나서기도 하였다. 1938년 3월 10일 안창호가 숨을 거둔 이후, 미국 국방자위군 지원에 참가하여 적십자사와 각 병원 복무, 야간순행 경찰대 보좌, 육해군 국방공작 활동에 참여하였다. 또한 전시공채 판매 등을 장려하는 한편, 태평양군도와 원동전선에서 특무공작에 참여할 의용대 모집에 협조하는 등 미국정부의 전쟁 수행을 도왔다. 1948년까지 대한여자애국단은 대한민국임시정부와 미국정부의 전쟁 지원을 위해 27만 달러를 모금하였다. 1944년 5월 7일 대한여자애국단에서 마련한 회갑축하연원래 회갑일은 4월 18일이나 이날 모임을 가졌다에서 “우리의 마음은 각각 다르고 생각은 저마다 같지 않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하고자 하는 원대한 목적과 일은 같다”고 말하였다. 1946년 1월 6일 대한인국민회 총회관에서 열린 신년도 첫 총회임원회에서 대한여자애국단 총단장으로 선출되었다. 총단장으로 재임하는 동안, 생활난에 처해 구제를 요청해 온 쿠바 거주 동포들을 위한 구제금 모금을 통해 121달러를 지원하였다. 6.25전쟁 기간 동안 한국구제회(Korea Relief Society)를 통하여 자원봉사를 하며 옷가지·약품·담요 등을 고국으로 보내는 구제활동을 전개하였다. 1962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개최된 3·1절 기념식 때, 남편 안창호에게 수여된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을 대신 받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8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이명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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