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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덕기

全德基

1875. 12. 8 ~ 1914. 3.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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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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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계몽운동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서울특별시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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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단체

  • · 독립협회
  • · 신민회
  • · 상동청년회
  • · 상동청년학원

포상 정보

  • · 독립장(1962)

관련 사건

  • · 을사늑약 반대투쟁
  • · 헤이그 특사 파견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독립장(1962) 1875년 (음)12월 8일 서울 정동의 한미한 집안에서 아버지 전한규(全漢奎)와 어머니 임씨(林氏)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정선(旌善)이며 이명은 전봉운이다. 1884년 9세 때 부모를 잃은 후 남대문에서 숯장사를 하던 삼촌 전성여(全成汝)의 양자로 입적되었다. 가난 때문에 정식 교육을 받지 못하고 서당에서 한문을 공부하였다고 한다. 1895년 20세 때 조정식(曺貞植)과 결혼해 슬하에 4남을 두었다. 1892년 17세 때 미국북감리회 선교사 스크랜턴(W. B. Scranton)을 만났고, 스크랜턴이 서울 정동에서 운영하던 시병원(施病院)의 사무원으로 고용되었다. 처음에 외국인 선교사에 대해 반감을 가졌으나 스크랜턴의 인품과 배려에 감화되어 교회에 출석하게 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1896년 스크랜턴에게 세례를 받고, 1897년 상동감리교회(尙洞監理敎會)의 입교인(入敎人)이 되었다. 그해 9월에는 상동교회 엡웟청년회(Epworth League, 懿法靑年會)가 창립되었는데, 이 단체에서 적극 활동하였다. 이 무렵 독립협회(獨立協會)에도 참여하였으며, 이승만(李承晩)·정순만(鄭淳萬)·박용만(朴容萬) 등 이른바 ‘3만’과도 교유하였다. 이들이 고종의 황위를 황태자에게 넘겨야 한다는 격문을 만들어 뿌렸다거나, 주시경(周時經)과 함께 이승만을 탈옥시키려다 실패하였다는 등의 일화도 있다. 한편, 1900년 무렵 해산된 상동교회 엡웟청년회를 1903년 재건하고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상동청년회’라 불린 이 청년회는 1900년대 민족운동의 거점 역할을 하였으며, 이 단체를 중심으로 이른바 ‘상동파(尙洞派)’가 형성되었다. 민영환(閔泳煥)·이동휘(李東輝)·이시영(李始榮)·이상설(李相卨) 등이 청년회를 후원하였다고 한다. 1904년 상동청년회는 일제의 황무지개척권 요구에 저항하여 조직된 보안회(保安會)의 활동을 지원하였다. 1905년에는 멕시코 교포 실태를 조사하기 위해 박장현(朴長鉉)과 이범수(李範壽)를 현지에 파견하기도 하였다. 특기할 것은 중등교육기관인 상동청년학원(尙洞靑年學院)의 설립이었다. 이 학원은 상동교회 교인을 비롯한 국내외 유지와 선교사들의 후원을 받아 “청년을 가르쳐 인재를 배양”하기 위한 취지로 1904년 10월 15일 개원하였으며, 초대 교장으로 이승만을 선임하였다. 여기에 참여해 성경을 가르치면서 학원의 자립적 운영을 위해 노력하였다. 초기의 청년학원은 3년 과정이었으나 1907년부터 4년 과정으로 개편되었으며 오전반과 오후반으로 나뉘어 운영되었다. 더불어 국어강습소·국문야학교·국어강습회, 수리학강습소·정측(正測)야학교, 일어강습소·중어강습소·음화(音畵)강습소 등 다양한 단기과정을 운영하였고, 1905년 『수리학잡지(數理學雜誌)』와 1906년 『가정잡지(家庭雜誌)』를 창간하는 등 계몽운동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그리고 김진호(金鎭浩)·남궁억(南宮檍)·여준(呂準)·이승만·이동녕(李東寧)·이만규(李萬珪)·이필주(李弼柱)·이회영(李會榮)·장지영(張志暎)·조성환(曺成煥)·주시경(周時經)·현순(玄楯) 등이 교장이나 교사를 맡아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이처럼 청년학원은 다양한 근대교육을 실시했을 뿐 아니라 민족운동에 투신한 다수의 교사와 학생들을 배출한 기관으로도 명성을 얻었다. 아울러 상동교회에서 1886년 설립한 초등교육기관인 공옥학교(攻玉學校)의 교장도 맡았다. 1905년 11월 전개된 을사늑약 반대투쟁에서도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상동교회에서는 매일 밤 국가를 위한 기도회가 열렸고, 전국 엡웟청년회 대표들의 모임을 명분으로 기산도(奇山度)·김구(金九)·옥관빈(玉觀彬)·이동녕·이준(李儁)·정순만 등 각지의 우국지사들과 함께 상동교회에서 회합하였다. 이들과 더불어 복합상소와 가두연설로써 을사늑약을 반대했으며, 정순만 등과 함께 ‘을사오적’ 암살을 계획하였다고도 한다. 하지만 이같은 항일투쟁 때문에 일제의 압력을 받은 선교사들은 1906년 상동청년회를 해산시켰고, 이에 우덕순(禹德淳)·이동녕·이상설·정순만 등 청년회 관계자는 해외로 망명하여 민족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처럼 상동청년회의 해산은 ‘상동파’의 해외망명을 촉진시켰고, 일제가 파악했듯이 독립협회에서 상동청년회 그리고 해외독립운동으로 확대·발전되는 계기가 되었다. 1907년에는 선교사직을 사임한 스크랜턴에 이어 상동교회의 담임목사를 맡았다. 그리고 같은 해 4월 결성된 신민회(新民會)의 창립위원으로 참여하였으며 이후 재무관련 업무를 맡았다. 신민회의 창립 기반은 상동청년회를 중심으로 형성된 ‘상동파’였다. 그해 헤이그특사 파견에도 깊숙이 관여했는데, 특사인 이준과 이상설, 해외에서 이들을 후원한 박용만·이동녕·정순만 등이 ‘상동파’였다. 아울러 선교사인 헐버트(H. B. Hulbert)도 특사들을 적극 후원하였다. 그해 국채보상운동이 전개될 때는 청년학원에 모금소가 설치되기도 하였다. 1898년 속장(屬長), 1900년 유사(有司), 1901년 권사(勸師), 1903년 전도사(傳道師) 등으로 임명되었고, 1900년 신학공부를 시작하여 1905년 집사목사(執事牧師), 1911년 장로목사(長老牧師) 안수를 받았으면서 상동교회와 감리교회의 지도자로 성장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한규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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