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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重鳳

重鳳

1871 ~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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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李重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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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청풍(淸風)의병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충청북도 청풍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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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단체

  • · 이강년 의병부대

포상 정보

  • · 독립장(1995)

관련 사건

  • · 후기의병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독립장(1995) 충청북도 청풍군(淸風郡) 동면(東面) 도화동(桃花洞, 현 제천시 청풍면 도화리) 출신이다. 기록에 따르면 1871년생으로 추정된다. 본관은 달성(達城), 이명은 이중봉(李中鳳)이다. 1907년 이강년(李康秊) 의병부대의 우군장(右軍將)과 소모장(召募將)으로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에 이어 1907년 광무황제(고종)의 강제 퇴위와 대한제국 군대 해산 소식이 전해지자, 전국 각지에서 국권회복을 위한 의병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07년 8월 이후 이강년 의병부대에 합류하여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이강년은 1907년 7월 대한제국의 군대 해산 후 원주진위대가 봉기했다는 소식을 듣고 재기하여, 그해 8월 10일 영월 배향산(拜向山)에서 무기와 군사를 소모하여 병력을 이끌고 8월 13일 제천(堤川)으로 이동하였다. 8월 15일 제천 천남(泉南)에서 벌어진 전투에 참여하였으며, 일본군 5명을 사살하고 13명을 부상을 입히는 전과를 거두었다. 천남전투에서 승리한 이후 이강년 부대는 8월 19일 강원도 주천(酒泉)으로 이동하여 도창의대장(都倡義大將)으로 추대된 그를 중심으로 부대를 재정비하였고, 이때 우군장(右軍將)에 임명되었다. 8월 말 이강년 부대는 문경방면으로 진출하여 이 지역을 장악한 뒤, 9월 9일 조령(鳥嶺), 9월 10일 갈평(葛坪), 9월 14일 적성(積城) 등지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갈평에서 승리를 거둔 이후 일제 군경의 추격을 피해 이강년 부대는 적성을 거쳐 14일 봉명사로 이동하여 머물고 있었다. 그리고 부대의 후미에서 후군장 신태식(申泰元)은 70여 명의 부대원을 거느리고 흩어진 군졸을 소모하기 위해 적성으로 이동하였다. 이때 마쓰노(松野) 대위가 이끄는 일본군 부대와 전투가 벌어졌고, 의병 36명이 전사하는 피해를 입고 퇴각하였다. 이 전투에 참여하여 분전하던 중 일본군의 총격에 부상을 당하였다. 포수 김흥룡(金興龍) 등 부상으로 상처를 입은 의병들과 함께 들것에 실려 단양(丹陽) 동가리점(東加里店)의 이강년 본진으로 이송되어 치료를 받았다. 적성전투 이후 단양으로 이동한 이강년 부대는 단양·영춘(永春)·영월(寧越)·제천·괴산(槐山)·연풍(延風) 등지에서 일본군과 크고 작은 전투를 벌였다. 이때 우군장으로 포군 김만종(金萬鍾)을 비롯해 70~80명의 부대원을 이끌고 10월 1일 충주군 덕산면(德山面) 동창동(東倉洞)의 석호룡(石好龍)으로부터 송아지 1마리와 같은 마을 주민 등에게서 짚신 등 군수를 징발하였다. 10월 6일에는 총독장(總督將) 이만원(李萬源)과 우군선봉장(右軍先鋒將) 권용일(權用佾)로 함께 수백 명을 거느리고 연풍에서 일본군과 접전을 벌였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 4명을 처단하,고 3명을 사로잡는 전과를 거두었다. 이이서 연풍의 순사주재소(巡査駐在所)를 공격할 때 총 3자루, 탄약 20발, 칼 2자루, 제복, 제모 각 3개 등 군수품 여러 점을 수습하였다. 그리고 이강년 부대가 당동(堂洞, 현 충청북도 단양군 대강면)에 머물 무렵 여러 차례 전투로 부대원들이 흩어지자 그의 명령을 받아 소모장이 되어 도총독(都總督) 이만원, 선봉장 권용일과 함께 각지에서 의병을 소모하였다. 이강년 의병부대는 이후 강원방면으로 이동하여 11월 16일 영월 거석리(巨石里)에 유진하며 부대를 재편하며 진용을 정비하였다. 그리고 다시 소백산을 넘어 죽령(竹嶺)·순흥(順興)에서 일본군을 공격하여 큰 피해를 입혔다. 그러나 12월 원주·충주의 일본군과 남부수비관구 예하 일본군 주력이 남북에서 협공하며 추적해 왔고, 계속되는 강행군으로 추위와 굶주림으로 동사자가 발생하였다. 그러던 중 12월 16일 배향산을 향해 이동하기 위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장항령(獐項嶺)을 넘어가기에 앞서 도총독 이만원과 함께 먼저 고개를 넘어 일본군의 상황을 정탐을 하였다. 그 뒤 이강년의 본진은 부대를 3진으로 나누어 장항령을 넘어 복상동에 이르렀다. 부대의 이동을 멈추고 잠시 휴식을 취할 때 일본군 제1순사대의 기습 공격을 받았다. 겹겹이 포위한 일본군의 포위망 속에 분전 하였으나 많은 의병이 죽거나 부상을 당하며 흩어지는 참패를 당하였다. 이 과정에서 동료인 참모 원하정(元荷汀)·신숙(申橚)·신명희(申明熙), 총군 이달(李達) 등 10여 명과 함께 일본군에게 생포되었다. 붙잡힌 후 감옥에 수감되어 종신형을 받았다. 그러나 형을 선고 받은 후에도 유배지가 결정되지 않아 7개월 간 수감생활을 계속하였다. 그러던 중 1908년 6월 2일 동생이 죽고 종제(從弟)와 5세 되는 아들을 잃었다는 소식을 접하였다. 이에 자신의 형 집행을 신속히 처분해주길 바라는 호소문을 충주경찰서장 앞으로 제출하였다. 『운강선생창의일록』에 따르면, 황제의 명령으로 특지를 받아 사면되어 고향 집으로 돌아가 사망하였다고 한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원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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