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哲衡
哲衡1873. 1. 19 ~ 1918. 2. 18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기삼연 의병부대(호남창의회맹소)
포상 정보
- · 독립장(1993)
관련 사건
- · 후기의병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독립장(1993) 1873년 1월 19일 전라북도 고창군(高敞郡) 아산면(雅山面) 반암리(盤岩里)에서 이병규(李炳奎)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전의(全義)이고, 자(字)는 경옥(敬玉)이며, 이명은 이철형(李喆衡)이다. 활동 당시에는 전라남도 영광군(靈光郡) 내동면(內東面) 수곡리(水谷里)에 거주하였다. 1891년 식년시(式年試)에 생원(生員)으로 합격해 일제 측 기록에는 이진사(李進士)로 지칭되기도 하였다. 1907년 고종의 강제 퇴위와 대한제국 군대의 강제 해산 이후 항일투쟁이 한층 더 거세지면서 기삼연(奇參衍)은 9월 전남 장성군(長城郡) 수연산(隨緣山)의 석수암(石水庵)에서 영광(靈光)·나주(羅州)·함평(咸平) 등지에서 활동하던 4~5개의 의병부대를 모아 호남창의회맹소(湖南倡義會盟所)를 결성하였다. 이때 기삼연 의병부대에 참여해 중군장(中軍將)으로 임명되었다. 기삼연은 의병장마다 별도의 의병부대를 편성해 각 지역으로 분산해 활동하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중군장으로 70~8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장성·함평·영광·무장(茂長)·고창(高敞) 등 전남 일대에서 활동하였고, 필요에 따라 다른 의병부대와 연합해 여러 차례 전투를 벌였다. 1907년 11월 1일 고창분파소를 습격해 무기를 획득하고, 일본인 2명을 사살하였다. 11월 3일에는 영광의 법성포(法聖浦)에서 통령(統領) 김용구(金容球) 등과 연합한 후 일제 군경 10여 명을 사살하고, 일본인 가옥 10여 호를 소각하였다. 이어서 11월 19일에는 영광을 공격하기 위해 읍성 남문(南門) 밖에 이르러 일제 군경과 3시간 넘게 접전을 벌이며 10여 명을 사살하였으나, 읍성이 견고하고 적의 저항이 심해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퇴각하였다. 1908년 1월 12일에는 김태원(金泰元) 의병부대와 연합하고 함평을 공격하였다. 이 무렵 의병부대의 전력을 유지하기 위해 영광군 일대에서 총기와 포수(砲手)를 모집한 결과 100정의 총기를 확보하였고, 방해하던 일진회원 1명을 영광군 외서면(外西面) 죽기(竹基)에서 총살하였다. 당시 일제 보고문서에는 “김유성(金有成, 김용구)·이대극(李大克) 등과 함께 연합한 의병부대가 200~250여 명이었고, 기총(騎銃) 3정·양도(洋刀) 1점·진위대(鎭衛隊)의 구총기 30정·장대(長大)한 화승총 약 20정·보통 화승총 100정 등의 무기를 보유하고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같은 해 1월 19일에는 김용구 등의 의병부대와 연합해 장성군의 탑정리(塔亭里, 현 장성군 황룡면 와우리)에 머물고 있다가, 새벽에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큰 피해를 입고 다내동(多內洞)으로 후퇴하였다. 1월 26일에는 기삼연·김태원 의병부대와 연합하여 나주를 공격하였다. 이후 기삼연이 담양(潭陽) 금성에서 참패를 당한 후 체포되자, 독립적으로 10~20명 또는 50~60명의 의병들을 이끌고 태인(泰仁)·순창(淳昌) 일대에서 지속적으로 활동하였다. 1908년 3월 계속된 일제 군경의 집요한 토벌과 추적을 견디지 못하고 면죄빙(免罪憑)을 내린다는 장성군수 등의 권유에 따라 7명의 부하와 함께 잠시 위장 귀순하였다. 그러나 일제 측 기록에 “귀순을 원하였으나, 드디어 도망하여 목하 종적이 불명하다”는 언급처럼 잠시 종적을 감추었다가, 1908년 말 활동을 재개한 후 주로 일제의 감시를 피해 의병부대의 군자금 모집 활동에 집중하였다. 같은 해 (음)12월 25일 최영선(崔永善) 등 14명의 부대원을 거느리고 영광군 외동면(外東面) 남촌(南村) 기생원(奇生員)으로부터 6원(엽전 30냥)을 군수금(軍需金)을 차출하였다. 이어서 다음날에는 통안리(通安里) 이경광(李京光)으로부터 당목(唐木) 1필과 백목(白木) 1필을 징집하였다. 12월 28일에는 동계리(東溪里) 김모(金某)에게 6원(엽전 30냥), 12월 29일에는 가정리(柯亭里) 신도홍(申道洪)로부터 20원(엽전 100냥)을 군자금으로 모집하였다. 이처럼 비밀리에 군자금 모집 활동을 펼치다가 붙잡혀 일제 경찰에게 조사를 받고 재판에 넘겨졌다. 1909년 11월 24일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에서 이른바 강도죄로 교수형을 받았다. 이에 불복해 항소하였고, 1910년 1월 18일 대구공소원에서 다시 징역 15년을 받았다. 옥고를 겪다가 다시 6년 8월로 감형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원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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