林夏仲
夏仲1871 ~ 1910. 7. 29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안규홍 의병부대
포상 정보
- · 독립장(1990)
관련 사건
- · 후기의병(안규홍 의병부대)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독립장(1990) 전라남도 보성군(寶城郡) 옥암면(玉岩面) 유천동(柳川洞) 출신이다. 판결문에 따르면 1910년 당시 나이가 40세이므로 1871년생으로 추정된다. 농업에 종사하였으며, 1908년 안규홍(安圭洪) 의병부대에 참여해 활동하였다. 평민 의병장인 안규홍은 1908년 2월 강성인(姜性仁) 의병부대에 합류해 활동하다가, 의병활동을 빌미로 민폐를 끼치던 강성인을 처단하고 의병대장으로 추대되었다. 그리고 안규홍은 보성군 일대를 중심으로 항일활동을 전개하며 1908년 2월 파청대첩(巴靑大捷), 8월 진산대첩(眞山大捷), 1909년 3월 원봉대첩(圓峰大捷) 등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1909년 2월경 안규홍 의병부대에 합류하고 도십장(都什長)과 운량관(運糧官) 등을 역임하였다. 그러면서 의병장을 도와 1909년 8월까지 전남 보성·장흥(長興)·순천(順天) 일대에서 군자금을 모집하고 친일파를 처단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1909년 3월 6일 안규홍으로부터 일진회 회원 박봉조(朴鳳朝)를 응징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에 장인초(張仁初)·염인서(廉仁瑞)·염군명(廉君明) 등 동료들과 함께 보성군 봉동(鳳洞)에 있는 박봉조의 집을 급습해 박봉조를 붙잡은 뒤 즉결 처단하였다. 6월 13일에는 의병부대의 선봉장 임창모(林昌模)와 함께 전남 장흥군(長興郡) 회령면(會寧面) 승평리(昇平里)에 사는 문남서(文南瑞)에게 군자금 56원을 모집하였다. 6월 30일에는 임창모를 포함한 부하들과 함께 보성군 남상면(南上面) 칠동(七洞)에 거주하는 최태경(崔泰京)을 처단하였다. 하지만 1909년 9월부터 진행된 일제의 ‘남한대토벌작전’으로 더 이상 의병활동을 지속하기가 어려운 상황이 되었고, 의병부대도 해체되었다. 이때 부하 30여 명과 더불어 보성에서 붙잡혀 조사를 받고 재판에 넘겨졌다. 1910년 3월 31일 광주지방재판소에서 이른바 폭동죄, 강도죄, 모살죄로 교수형을 받았다. 이에 불복해 항소하였고, 같은 해 6월 9일 대구공소원에서 원판결이 취소되었지만 다시 교수형을 받았다. 이어서 의병활동은 인정하지만 살인과 강도죄는 인정할 수 없다며 재차 상고하였지만, 그해 1910년 6월 27일 기각되고 형이 확정되었다. 1910년 7월 29일 대구감옥에서 형 집행으로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노상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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