林得山
得山1896. 4. 20 ~ 1943. 3. 2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대한민국 임시정부
- · 대한적십자회
- · 구국모험단
- ·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 · 병인의용대
- · 한국독립당
- · 대한독립애국부인회
- · 대한청년외교단
- · 의열단
포상 정보
- · 애국장(1991)
관련 사건
- · 대한애국부인회 사건
- · 대한청년외교단사건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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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장(1991) 1896년 4월 20일 평안북도 철산군(鐵山郡) 운산면(雲山面) 자작동(自柞洞)에서 태어났다. 이명은 임형일(林亨一)이다. 중국 상하이(上海)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설립되자 상하이-만주-국내 독립운동 단체 간의 연락과 독립운동 자금 모금 활동을 펼쳤다. 의열투쟁을 목적으로 하는 독립운동 단체에 참가하여 폭탄 제조와 밀수 활동을 하였으며, 대한민국 임시의정원과 흥사단(興士團)·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 등에서 활동하였다. 1919년 4월 11일 임시정부가 설립된 이후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국내 독립운동 단체와 임시정부를 연결하고, 대한적십자회(大韓赤十字會)에 가입하여 독립운동 자금을 수집하는 활동을 펼쳤다. 1919년 4월경 서울에서 김마리아·오현주(吳鉉珠)·이정숙(李貞淑) 등이 조직하여 임시정부 독립운동 자금 모집을 담당한 대한독립애국부인회의 통신원으로 배치되어 서울과 상하이를 왕래하였다. 또한 서울에서 이병철(李秉澈)·조용주(趙鏞周) 등이 1919년 5월경 조직한 대한청년외교단(大韓靑年外交團)에 참여하여 세계 각국에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는 외교원 특파 등의 활동 계획을 세우고 여비를 지원받으며 임시정부와 연락을 담당하였다. 1919년 11월 20일 ‘대한애국부인회 사건’이 일어났다. 부인회 통합 계획 및 독립운동 관계 문서를 일제 경찰이 발견하여 조직이 드러난 것이다. 이후 “단체를 조직하여 동지 규합, 자금모금에 노력하여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연계로 상하이로 건의문과 독립자금을 휴대 파견하였다”는 이유로 1920년 6월 29일 대구지방법원 궐석(闕席)판결에서 이른바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3년을 받았다. 1919년 6월 임시정부 활동을 지원하고 무장 항일 투쟁을 위한 화약 제조를 목적으로 김성근(金聲根)이 조직한 구국모험단(救國冒險團)에 가입하여 폭탄 제조 등의 활동을 펼쳤다. 1919년 12월 11일부터 1920년 5월 14일까지 임시정부 재무부(財務部) 서기(書記)로 활동하였다. 1920년 4월 29일 상하이 프랑스 조계 내 김성근(金聲根) 집에서 폭탄을 제조하던 중 폭탄이 터지는 사고가 일어나 김홍식(金弘植)·이규호(李圭鎬) 등과 함께 프랑스 조계 공무국 경찰에 붙잡혔으나 다음 날 풀려났다. 제조한 폭탄을 가지고 평북 철산(鐵山)·용천(龍川)·선천(宣川) 등지에서 군자금 모집을 하는 한편, 1920년 8월에는 선천경찰서(宣川警察署) 폭탄 투척에 가담하였다. 이후 상하이와 만주를 오가며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 출신이 중심이 되어 일제의 무력에 대항하고 직접 투쟁 방법인 암살과 폭파 등을 목적으로 한 의열단(義烈團)에 폭탄을 제공하였다. 1922년 6월경 중국 안둥현(安東縣)의 이륭양행(怡隆洋行)에 머물며 독립운동 임무를 수행하였고, 같은 해 9월에 열린 국민대표회(國民代表會議) 남만촉성회(南滿促成會) 회의에서 주비위원으로 선정되었다. 1923년 2~6월 김두만(金斗萬)·백기준(白基俊) 등과 함께 서간도(西間島)를 대표하는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원에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그해 7월 서울에서 부업공진회(副業共進會)가 열리자, 이를 폭파할 계획을 세우고 폭탄 50개를 서간도의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로 발송하였으나 일제 경찰에 발각되어 압수당하였다. 1923년 12월경에도 대한통의부와 연락하면서 안둥현의 이륭양행을 거점으로 활동하였다. 1924년 6월경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평안도 선거회 선거에서 김문희(金文熙)와 함께 선정되어 출석하였고, 그해 12월경 의열단원으로 단장 김원봉(金元鳳)과 함께 활동하였다. 1925년 3월 13일 제13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곽헌(郭憲)·최석순(崔錫淳)·문일민(文逸民) 의원과 함께 임시헌법 제22조 제14항에 의거하여 미국 하와이 교민 인구세 징수 문제와 헌법 및 임시의정원 부인 문제 등의 명목으로 ‘임시 대통령 이승만 심판 결의안’을 가결시켜 대통령 탄핵안을 제안하였고, 그해 5월 불신임안이 의결되도록 하였다. 1926년 1월경 상하이에서 나창헌(羅昌憲)·이유필(李裕弼) 등을 중심으로 임시정부의 권위를 옹호하며 일제의 시설과 밀정을 주살하여 한국의 독립을 목적으로 하는 병인의용대(丙寅義勇隊) 조직에 참여하였으며, 박창세(朴昌世)를 대장으로 추대하였다. 1932년 11월 24일 임시의정원 의원을 사임하였으며, 1933년 1월 흥사단(興士團) 원동대회 이후 원동반(遠東班)이 조직되자 신언준(申彦俊)·문일민과 함께 제1반에 소속되어 활동하였다. 1934년 임시정부가 중국 난징(南京)으로 옮긴 뒤 한국독립당 난징지부를 조직하고, 이광제(李光濟)·이치섭(李致燮)·이동초(李東初) 등과 지부를 이끌었다. 1937년 1월 29일 상하이 프랑스 조계에서 프랑스 경찰을 대동한 일본 영사관 경찰에게 장성산(張聖山)·김시문(金時文) 등과 함께 붙잡혀 구류되었으나 5일 후에 풀려났다. 그해 7월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민족혁명당(民族革命黨)과 중국 측 국방비로 각 5,000원을 성금으로 기탁하였다. 1938년 1월경 중국 한커우(漢口) 등에서 김구(金九)·안공근(安恭根)과 임시정부의 전쟁 피난과 독립운동 방략에 대해 논의하였다. 1940년 7월경 흥사단 원동지부가 해소될 때까지 활동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김명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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