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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덕로

張德櫓

1883. 1. 13 ~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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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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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북 의주(義州)임시정부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평안북도 의주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지도에서 보기 →

관련 단체

  • · 대한독립청년단
  • · 대한민국 임시정부
  • · 흥사단
  • · 임시정부 경제후원회
  • · 공평사
  • · 한국독립당
  • ·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포상 정보

  • · 애국장(1990)

관련 사건

  • · 1919년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1990) 1883년 1월 13일 평안북도 의주군(義州郡) 고성면(古城面) 용산동(龍山洞)에서 아버지 장하서(張河瑞)와 어머니 고씨(高氏)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호는 성산(聖山)이고, 이명은 한자가 다른 장덕로(張德魯)이다. 6살 때부터 12살 무렵까지 용산재(龍山齋)에서 한문을 배웠고 1902년에는 평양(平壤)·선천(宣川)에서 사범(師範) 강습을 받았다. 1903년부터 4년 동안 고향의 신영학교(信英學校) 교원으로 일하다가 평양장로회 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여 1913년에 졸업하였다. 졸업 후 1918년까지 평북노회(平北老會) 부서기 및 서기, 전도사 및 목사로 활동하며 마전교회(麻田敎會) 부설 교육기관인 신명학교(新明學校) 교장을 역임하였다. 1919년 유여대(劉如大)·김병조(金秉祚)·김승만(金承萬)과 함께 의주의 만세운동을 준비·주도한 후 4월에 목사 안승원(安承源)·김병조 등과 더불어 중국 상하이(上海)로 건너갔다. 같은 해 5월 23일 여운홍(呂運弘)이 파리강화회의 참석을 위해 프랑스로 떠날 때 한국 교회가 일본의 압박 하에서 고통받고 있음을 국제연맹(國際聯盟)과 만국장로교연합회(萬國長老敎聯合會) 등에 알리는 호소문 전달을 부탁하였다. 이 호소문은 목사 안승원·김병조·손정도(孫貞道)·이원익(李元益)·조상섭(趙尙燮)과 장로 4명의 연서로 작성되었다. 이후 중국의 안둥(安東)·상하이·난징(南京)을 무대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대한청년단연합회(大韓靑年團聯合會)는 대한독립청년단을 계승하여 1919년 11월 안둥에서 조직된 독립운동 단체이다. 창립 시 기관지 편집위원으로, 이듬해 4월 19일 제2회 정기총회에서는 편집부장으로 선출되었다. 임시정부는 1920년 안둥교통국을 설치하면서 대한청년단연합회의 인적 기반을 교통국 운영 기반으로 삼고자 회원들을 직원으로 임명하였다. 이때 안둥교통국 참사로 임명되었고 1921년 5월 양준명(梁濬明) 국장이 사임하자 잠시 국장 역할을 맡아하였다. 1921년 3월 상하이 거주 한인 기독교인 조직인 대한야소교진정회(大韓耶蘇敎陳情會)가 설립되었을 때 서기를 맡았다. 같은 해 6월 국민대표회 기성회 제2회 평북 대표 집행위원으로 선임되었고 11월에 열린 총회 때는 총 10인의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8월 임시정부가 태평양회의에 한국의 독립문제를 제기하기 위해 (對)태평양회의 외교후원회를 상하이 프랑스 조계에서 조직하였다. 8월 26일 제3회 총회에서 간사로 선임되었고, 같은 해 10월 3일에 개최된 제5회 간사회에서 주간지 『선전(宣傳)』의 기자로 선임되어 활동하다가 난징(南京)으로 이주하였다. 1926년 상하이에 이어 난징에도 임시정부 경제후원회가 조직되자 임원으로 참여하였다. 1924년 3월 차리석(車利錫)과 선우혁(鮮于爀)의 보증으로 흥사단(興士團) 예비단우(豫備團友)로 입단하여 난징 동명학원(東明學院)의 간사를 맡았고, 1925년 1월 통상단우(通常團友)가 되었다. 흥사단은 1913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창단된 이후 그 세력을 국내·중국·러시아·만주 등지로 넓혀 1920년 상하이에 흥사단 원동임시위원부(遠東臨時委員部)를 설치하였다. 주로 중국 지역을 무대로 한 독립운동가 양성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지원이 핵심 역할이었다. 원동임시위원부 설립 후 인삼이나 개성 특산 직물인 송고직(松高織) 행상으로 생계를 유지하며 흥사단 원동임시위원부의 감찰원(檢察員), 반장, 회계, 도서부원, 원동대회 간부 등으로 활약하였다. 1929년 민족유일당 운동이 결렬된 후, 1930년 1월 25일 김구(金九)·안창호(安昌浩)·조소앙(趙素昻)·이동녕(李東寧) 등 민족주의 진영이 단결하여 상하이에서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을 창당했을 때 창당 멤버 26명 중 한 명으로 참여하였고 이후 당 간부로 활동하였다. 1933년 1월 15일 한국독립당 대회 때에는 김구·김두봉(金枓奉) 등과 함께 이사로 참석하여 민중운동, 외교, 경제 등을 논의하였다. 1931년 3월 25일 안창호가 이사장으로 흥사단 내 경제합작 운동단체 공평사(公平社)를 설립하자 이사 및 상무원, 경리 등으로 근대적 협동조합 운영 및 군자금 조달에 힘썼다. 같은 해 10월 21일 임시정부가 일제의 만주사변 도발에 대한 대응 선전과 이후의 대책을 논의하기 위한 상하이 주재 한인각단체대표회의(韓人各團體代表會議)를 소집하자 이 회의에 안창호와 함께 흥사단 대표로 참석하였다. 이 자리에서 중국시민대회에 대표를 파견하고 배일원중(排日援中) 선전을 할 것, 배일 선전물을 인쇄하여 배포할 것 등을 결의하였다. 1934~35년경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활동하였다. 1932년 안창호가 붙잡힌 후 흥사단 활동이 정체되고 자매단체인 수양동우회(修養同友會)가 해산되자 1940년 7월 16일 상하이 흥사단 원동지부 위원장으로서 ‘해소성명서’를 발표하여 원동지부를 해산하였다. 1945년 8월 일제의 패망으로 광복이 되자 1948년 12월에 귀국할 때까지 위원장으로서 조직 재건에 힘썼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89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김명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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